
바스라지는 낙엽같이
나라타주 X 가족게임
하야마 타카시 X 요시모토 코우야
요시모토 코우야는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현관문 앞에 놓여 있는 꽃다발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누구 간 사람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그 재수 없는 선배 놈이겠지. 짜증스럽게 꽃다발을 들어 올리자
꽃들 사이에 끼워져 있었던 모양인지 작은 카드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너 생각나서 샀어.
지겹지도 않은 모양이다. 뭐만 하면 제 생각이 나서 샀다고 두고 가는 걸 보면. 대충 그 카드를 구겨 버리며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요시모토는 그대로 꽃다발을 바닥에 던졌다. 뒤처리 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고 그렇다고 고이 모셔다가
꽃병이니 뭐니 하며 관리해줄 생각도 없었다. 한 마디로 짐이라는 것이었다. 대학생 자취방이 커봤자 얼마나 크겠으며
쓰레기 배출하는 게 얼마나 일인데. 바닥에 널브러지며 조금씩 떨어진 꽃잎들에 요시모토가 다시 짜증을 냈다.
그놈의 호기심이 문제였다. 궁금하다고 해서 굳이 그렇게 먼저 말을 거는 게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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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마 타카시는 과에서 꽤나 유명 인사였다. 뭐 그가 대단한 행동을 하고 다녀서라기 보단, 분명 잘생긴 것은 확실하나
그 미모를 머리와 안경으로 다 가리고 다닌다는 점 때문에. 요시모토는 동기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괜히 호기심이 일었었다.
하야마를 본 건 끽해야 과 사람들이 가득한 술집에서 끝자리에 앉아 조용히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모습뿐이었고
캠퍼스에서 그를 마주할 일은 딱히 없었다. 그 잘생겼다는 얼굴을 제대로 확인해 볼 시간은 없었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괜히 더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멀리서 봤을 땐 그냥 별 거 없었던 것 같은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던 하야마를 봤을 때, 요시모토는 눈을 반짝였다. 애초에 하야마가 요시모토보다
선배이기도 해서 동선이 겹칠 일이 잘 없으니 지금이 기회다 싶었다. 마침 비어있는 앞자리에 요시모토는 옳다구나 하고
그 자리를 선점했다. 그냥 얼굴이라도 자세히 들여다 봐볼 깜냥이었으니까 그 자리만큼 좋은 곳이 없었다.
겸사겸사 공부할 거리를 꺼내놓으며 요시모토는 책에 집중하고 있는 하야마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오. 유명할 만 하잖아.
힐끔힐끔 쳐다보던 것이 티가 났는지 하야마의 시선이 살짝 올라왔다. 의도치 않게 눈을 마주한 요시모토가 조금 당황했지만 싱긋 웃어 보이며 고개를 살짝 까딱이곤 시선을 제 책에 고정시켰다. 호기심은 다 충족했으니 이제 제 할 일이나 할 생각이었다. 한참을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무렵, 제 앞으로 캔 커피 하나가 들이밀어졌다. 의아함에 고개를 드니 이번엔 하야마가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이었다. 그래 여기까진 정말 다 좋았다. 이게 다들 한 번씩은 꿈꾼다던 캠퍼스의 로망이고 그런 거야?
하는 김칫국도 살짝 마신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서관을 나서는 하야마를 쫓아갈 리가 없지 않은가.
“선배.”
“어-.”
“요시모토요. 요시모토 코우야.”
“아, 요시모토 군.”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딱히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대학 선후배로서 나눌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이야기들.
뭐 그렇게 안면을 터서 시간이 맞으면 가끔 밥이나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사이가 됐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에는 요시모토는
하야마에 대해 연애적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애초에 하야마에게 다가갔던 것은 그저 하야마의 얼굴을 더 가까이
봐보고 싶다는 호기심에 의해 그랬던 것이었고 하야마가 내민 캔 커피에 혼자 김칫국을 마신 것도 그냥
‘도서관에서 말도 안 섞어 본 잘생긴 선배가 커피를 줬다’라는 상황이 아주 조금 설렜을 뿐이었으니까.
거기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요시모토는 하야마가 자신의 취향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았는걸.
그냥 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관심이 있으면 관심이 있다고,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연애가 하고 싶으면 사귀자고 돌진하는 편인 요시모토인지라 하야마가 이렇다 저렇다 할 말이 없으니
흥미가 금방 식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렇게 생각한 게 요시모토 뿐이었다는 것이었지만.
-
요시모토는 정말 지긋지긋했다. 하야마는 여전히 자신에게 자신의 마음을 뚜렷하게 표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얼굴을 보고 고백이라도 하면 걷어 차기라도 하지,
이렇게 선물 공세나 하면서 주변을 빙빙 도는 것이 요시모토를 화나게 했다.
동네의 꽃집은 다 털 생각인 모양이다. 어쩜 이렇게 다양한 꽃들을 주기적으로 사다 바치는지. 더 짜증나는 것은
요시모토가 하야마에게 자신의 자취방을 알려준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뭐 학교 근처 자취방이고 저와 좀 교류가
잦은 동기들을 붙잡고 물어보면 쉽게 나올 정보이긴 했지만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것이었다. 이 선배 그렇게 안 봤는데.
초반엔 요시모토도 당황했었다. 이름도 밝히지 않고 꽃다발만 덩그러니 놓아져있는데, 썸타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터라 이게 뭔가 싶어서. 그래서 한동안은 미친놈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제 동기 놈들을 붙잡고 꽃다발을 보낸 사람이 너냐고 물어보고 다녔었다. 우연찮게 제 자취방 쪽으로 꽃다발을 들고 걸어가던 하야마의 뒷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헛웃음이 나왔더란다. 설마 선배는 아니겠지, 라고 생각해서 물어보지도 않았던 건데 정말 설마하던 하야마 선배일 줄이야.
그런 하야마에게 당장 다가가 뭐하시는 거냐고 묻지 않았던 것은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조만간 저를 붙잡고
고백이라도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도 선배고, 나름 잘 지내고 있는 사이에 다짜고짜
서로 얼굴 붉힐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요시모토는 기다렸다. 자꾸 주변에서 빙빙 돌기만 하는 하야마가,
직접적으로 제게 다가오기를. 그래서 그놈의 꽃다발을 현관 앞이 아니라 제 앞에 직접 내미는 순간을.
그래야 요시모토도 그에 따른 대답을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순간은 절대 오지 않았다. 한 학기가 끝나고 그 다음 학기가 시작 될 때까지,
요시모토는 한 사람의 일방적인 마음을 받기만 해야 했다.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아주 잔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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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요시모토는 더 이상의 기다림을 멈추기로 했다. 학교 선배고 나발이고 그건 이제 제 알바가 아니었다.
요시모토는 참을 만큼 참았다며 자기 자신을 칭찬했다. 아직 버리지 않고 대충 테이블 위에 올려뒀던 꽃다발들 중 일부가
버석버석 말라비틀어져있었다. 집 안을 뒤져 대충 큰 쇼핑백을 꺼내온 요시모토가 그것들을 마구 욱여넣기 시작했다.
오늘에야말로, 끝장을 봐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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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알았어?”
“봤어요, 저번에. 뭐 그 때 꽃다발은 너무 오래 전이라 버렸지만.”
“아.”
“우리 집은 어떻게 아셨어요.”
“나도 저번에 봤어. 우연히.”
“꽃은 왜 자꾸 사다두시는 건데요.”
“......예쁘잖아.”
허. 생각보다 더 어이가 없는 이유였다. 꽃이 예쁜 걸 누가 몰라. 그게 다야?
“그래서요.”
“어?”
“선배 나 좋아해요?”
“......”
딱히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긴 했다. 애초에 대답을 들을 생각으로 물어본 것도 아니었고.
오늘 요시모토가 하야마를 붙잡아 대화를 하고 있는 이유는 그 마음을 거절하기 위해서니까.
“선배 자꾸 이러시는 거, 불편해요.”
“......미안. 몰랐어.”
“차라리 고백을 하고 차이시지, 왜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세요? 나 좋아하잖아요.”
“......부담스러울까봐.”
참, 할 말이 없었다. 요시모토는 그대로 입을 딱 다물었다. 그동안 머리 아프게 고민하고 화를 내던 자기 자신이
더 우스워 보일 지경이었다. 그냥 꽃다발을 들고 있던 하야마를 붙잡고 그 자리에서 잘라냈어야 했었던 거였다.
그게, 서로에게 좋은 방법이었던 게 분명하다. 요시모토가 굳이 한 번 더 생각해볼 문제가 아니었거늘.
괜한 배려가 사람을 귀찮게 만들어버렸다.
요시모토는 들고 온 쇼핑백을 하야마에게 건넸다. 하야마의 두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얘네들은 차마 버리진 못했어요. 그러니까, 그냥 선배한테 다시 돌려드릴게요. 저 지금 완강히 거절하는 거예요, 선배 마음.”
“......”
“이만 갈게요.”
바람이 꽤 서늘해진 탓에 쇼핑백을 들고 있던 손끝이 차가웠다. 요시모토는 겉옷 주머니에 제 손을 넣곤
그대로 하야마를 지나쳐갔다. 하야마는 차마 그 뒷모습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쇼핑백을 들고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다.
하야마는 조용히 쇼핑백 속에 손을 집어넣어 말라비틀어져 가는 꽃들을 한 번 매만졌다. 하야마의 손길에 꽃잎이
그대로 부스러졌다. 그것이 못내 속상해 부스러진 꽃잎들을 제 손 올려 들어 올렸으나 그마저도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땅으로 떨어져버렸다. 바닥 가득 구르고 있던 낙엽들 사이로 떨어진 탓에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 하야마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요시모토는 이제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않았고 주변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며 하야마의 발에 밟혀오는 낙엽들만 가득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