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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위의 매미

​아이바 마사키 X 사쿠라이 쇼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어릴 적, 우연히 보게 되었던 연극은 나의 눈을 가리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한 자극이었다.

화려한 옷을 입은 남배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사를 읊으며 천천히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끝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관객들은 배우의 시선을 따라 그 끝에 무엇이라도 있는 것마냥 상상하며 몰입하고 있었다.

그 분위기, 그 고요함. 그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를 멋있다고 생각했다.

깜깜한 무대 위, 오직 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그에게 매료되는 것은 식은죽 먹기였다. 
그가 마지막 대사를 끝내며 펼쳤던 손을 강하게 쥐었을 때, 사람들은 그에게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다.

나 또한 열렬하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배우는 만족한 듯 씨익 웃었고, 사람들의 함성은 그칠 줄 몰랐다. 그저 놀라웠다.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벅차올라서, 나는 박수를 멈추고 심장을 꾹 눌러야만 했다. 터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쿵, 쿵, 쿵. 여리고 작은 손바닥 안에서, 심장은 거세게 뛰며 자신의 열기를 뽐내고 있었다. 되고 싶다. 저렇게 되고 싶다!

강렬한 욕망은 이윽고 온 몸의 혈관을 깨우고 뇌를 울려 제 존재를 드러냈다. 그렇게 나는 꿈을 꾸게 되었다.

-저 무대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는 꿈이었다.

 

그것 봐, 또 아이바군이지.

누군가 내 생각을 읽은 줄 알았다. 기겁하며 돌아볼뻔한 것을 겨우 멈추고, 작게 심호흡을 한 후 슬쩍 눈만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T선배와 A였다. T선배의 뾰로통한 목소리에 불안해졌는지,

A는 조금 겁을 먹은 표정으로 힐끗힐끗 게시판과 T선배를 번갈아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아이바 선배 잘 하시니까..."
"잘 하지. 솔직히 걔가 우리 극단 다 먹여 살리고 있는 거 아니야?"
"그, 그래도 다른 분들도 잘 하고 계시고..."
"그래도 관객은 쟤 보러 온다니까? 난 아직도 쟤가 왜 우리 극단에서 죽치고 있는지 모르겠어. 다른 큰 극단 가면 상도 엄청 받을걸."
"그건..."
"천재잖아. 저거."

천재면 빨리빨리 위로 올라가기나 할 것이지. 결국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대는 T선배를, A는 하얗게 질린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A의 시야에서 보자면 그 옆에 있는 내가 적나라하게 보일 터이니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말을 얹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나는, T선배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는 바이니까.
게시판에 게재된 알림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대본을 펼쳐 내 이름을 찾아 보았다.
사쿠라이 쇼, 검은 옷의 남자.

배역 이름도 없는 것을 보아 하니 이번에도 또 조연 중의 조연이다. 대사는 얼마나 있으려나. 나오는 씬은 얼마나 있으려나.

딱히 찾아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펼쳐봤자 서글픔은 배가 될 뿐이니까.

주연, 아이바 마사키, 테오. 좋겠다, 테오. 즐겁겠네, 테오.

맨 앞에 적힌 아이바의 배역명을 입 안으로 굴려보다가 그대로 대본을 덮었다.

T선배는 강변의 여인이었고, A는 아예 스태프로 빠져있었다. 
오늘은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나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극단의 새로운 연극을 발표하고 주연을 선발하는 날이었기 때문에

아침 일찌감치 모였어야 했지만, 나는 아니었다. T선배도 A도 아니었다. 조연 중의 조연이란 그런 것이다.

선택받지 못한 우리는, 공고된 알림을 확인하고 자기 몫의 대본을 챙겼다가 나중에 대본 리딩 때나 총리허설 때만 알맞게 나와주면 된다. 옛날에는 그것이 너무 억울하고 서러워 화까지 났었는데, 이제는 그나마 좀 익숙해졌다.
문득, 어디선가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아주 익숙하고, 어쩌면 낯설고,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였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그 희미한 소리에 집중하느라고 나도 모르게 미간까지 구겼다. 그리고 그 때였다.

"매미다."
"-아이바."
"매미 울어, 쇼쨩! 아직 울기는 이르지 않나?"

도대체 언제 나타났는지, 갑자기 내 등에 업히듯이 몸을 기댄 아이바가 신이 난 듯 팔짝팔짝 뛰며 내게 그렇게 물었다.

그제야 나는 저것이 매미소리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제 막 6월이 된 오늘을 기억해냈다. 그랬다. 벌써 6월이었다.

확실히 아이바의 말대로 매미가 울기에는 이른 달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더워진 요즘을 생각하면 딱히 못 울 것도 아닌 달이었다.

"뭐, 더우니까."
"어? 더워? 내가 붙어있어서 그런가?"
"그 소리가 아니라...근데 진짜 너 언제까지 업혀있을거야?"
"아, 무거웠어? 미안, 미안!"

내가 타박하는 줄 알았는지 가볍게 사과하며 몸을 내린 아이바가,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그대로 내 팔을 붙잡았다.

꽤 억세게 붙잡고 있는 그 손을 질린 듯 쳐다 보았다가 다시 아이바의 얼굴을 보면, 역시나 말간 미소가 얼굴을 빛내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처럼 순진무구하고 멍청한 남자가 우리 극단의 슈퍼스타시라 이거다.
아이바 마사키, 23살.
이 극단에 입단하고 3년, 그러니까 작년부터 우리 극단의 주연 자리를 꿰차고 내놓지 않는 이 남자는, 놀랍게도

우리 극단에 입단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연기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증거로 그는 발음이 부정확했고, 성량이 크지 않았으며, 묘하게 뻣뻣했고, 무대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었다.

대본을 외우는 자신만의 방법이나 긴장을 이겨내는 마이페이스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결국 이 극단을 이끄는 슈퍼스타가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천재였기 때문에.
그는 여전히 발음이 웅얼거리고, 성량은 조금만 커졌고, 행동이 가끔 먹통이 된다.

그러나 그의 호흡에 무대가 들썩이고, 그의 눈빛에 관객은 숨을 죽인다. 그의 발걸음 한 번에 사람들이 심장은 두방망이 치고,

그가 스포트라이트의 한 가운데 서서 객석을 바라보면 모두가 금세 그의 극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게 되었다.

-이게 천재가 아니라면 뭘까.

아주 조금의 손짓과 아주 조금의 숨결을 가지고도 사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배우가, 천재가 아니라면, 악마밖에 더 되겠는가. 
T선배는 우리 극단보고 작은 극단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게 작은 극단은 아니었다.

이름이 있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건물도 있었고, 극단의 이름을 가진 연습실도 있었으며,

극단의 이름으로 그럴싸한 극장도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확실히 유명세가 있는 극단은 아니었다.

흑자일 때보다 적자일 때가 더 많았고, 스태프를 쓰기 힘든 탓에 배우들이 스태프의 일도 하곤 했다.

나만 해도 조명, 프롬프트, 의상 다림질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런 우리 극단은 작년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여 올해 한창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이유는 뭐, 설명하지 않아도 알테지만. 
-여기서 쓸데없는 이야기를 말하자면, 나는 천재를 좋아한다. 단번에 사람을 홀리는 그 재능을 두려워하면서도 숭배한다.

방송에 나오는 천재들의 이야기를 보며 박수를 치고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이들이기 때문에

즐겼던 것으로, 막상 내 옆에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천재가 나타나니 이렇게 속이 아플 수 없다.

나는 그를 이길 수 없는, 범재 중의 범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서였을까. 나쁜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아, 맞다. 아이바."
"응?"
"오늘 일 다 끝났어?"
"...아."

"끝났으면-내가 잠깐 실례해도 될까?"

낮게 깐 목소리로 작게 속삭이며 눈을 가느다랗게 뜬다. 내 팔을 잡고 있는 아이바의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할 이야기가 있는 척 살짝 몸을 가져다 대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 마른침을 삼키는 그의 마른 목이 시야에 들어와 웃음이 났다.

'너네 집에 가고 싶어.'

노골적인 유혹의 말을 귓가에 흘리고, 손가락으로 아이바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아까보다 조금 더 짙어진 것은, 아마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테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한 장난이었다. -그래, 장난이라기보단 작은 심술이었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 극단에서 일을 했으니 장장 7년을 있었는데, 이름 있는 배역을 받아본 적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주연? 어불성설이었다. 그래도 솔직히 행복했다. 어린 시절부터 꿈꿔왔던 것이니까.

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찼고, 관객들에게 보이진 않을 지언정 이 화려한 무대의 한 구석에나마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는 게 기뻤다. -그래도 역시 3년만에 입단한 무지렁이 같은 놈이 냅다 주연을 한답시고 꿰차서 극적인 성공을 거두면 거북하고

불쾌한 질투가 생기는 건 당연했다. 나도 사람인데!
그래서 뒷풀이 회식 때 질나쁜 짓을 했다. 살짝 술기운이 오른 그에게 다가가 슬쩍 섹스어필을 했다.

그래서 그 녀석이 질려하면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냐고 오히려 그를 망신주려 했다.

-그리고 그가 반응한다면...
회식이 끝나고 난 다음날 아침, 나는 아이바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그 얼굴을 보면서 얼마나 당황했고, 얼마나 황당했고, 얼마나 유쾌했는지 모르겠다. 그딴 장난에 잘도 넘어간 게 웃겼고,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는지 제가 한심했고,

그리고, 그리고. 그렇지만 나쁘지는 않아서, 그래서. 그렇게 아이바와 나는 여기까지 왔다.

-사귀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큼은 나도 아이바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명확하게.
이 관계가 유지된다는 것은, 나에게는 묘한 희열과 원통함을 한꺼번에 가져다 주었다.

극단의 슈퍼스타, 그것도 천재인 남자가 아무 사람으로도 대체 가능한 조연 중의 조연인 자신과 입을 맞추고 몸을 섞는다는 것이

나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난 그냥 아무 마을 사람인 게 아니다.

-그리고 이 생각이 얼마나 허무하고 덧없는지를 아주 잘 알기에, 그때문에 또 서러워졌다. 무슨 이중인격이라도 된 것만 같았다.
씻고 뒷처리까지 끝낸 후 여유롭게 나오면, 어느새 시트를 전부 갈아서 뽀송해진 침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드로즈만 걸친 채 자신의 대본을 들여다 보고 있는 아이바 마사키도 세트로 말이다.

어쩐지 저기압이 되버린 나에게 스스로가 당황하며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매트리스가 푹 꺼지는 감각에 뒤를 돌아본 아이바가, 나를 보더니 샐쭉 웃었다.

"쇼쨩, 가운 어울린다."
"뭐래. -...대본 봐?"
"응. 이번엔 어려운 대사가 많더라고."
"그래?"
"대본 안 봤어?"
"봐서 뭐해."
"-쇼쨩."

나무라는 목소리는 못 들은 척 그대로 침대에 누워버렸다. 생각해보니 괘씸하다. 누가 선배인데. 그렇지만 확실히 방금의 태도는

선배답지는 못한 짓이었다. 대본을 보지 않는 연극 배우라니. 주어진 배역에 열정이 없는데, 이런 나를 누가 좋은 자리에 써주겠어.

아아, 정말...-그러나 섣부르게 내뱉을 뻔한 말은 결국 꿀꺽 삼킨다. 때려치겠다고 말하기에는,

난 아직 나의 꿈을 너무나도 사랑했으니까.

 

주어진 대사는 단 세 줄. 출연하는 장면은 대부분이 단체씬. 그러니까 이름도 없지. 딱 세 번 봤을 뿐인데도 대사를 다 외웠다.

어째 점점 가면 갈수록 취급이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락을 달린다.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는 것도 사실은 질린다. 왜 자꾸 나만, 어째서 나만.
합을 맞추고 있는 주연과 비중 있는 조연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 분장도 하지 않았고,

그럴싸한 세트조차 없이 맞춰보고 있을 뿐이지만 이미 그건 훌륭한 연극이었다.

각본가와 연출가가 열정적으로 지도하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이대로 무대로 올려도 손색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아이바는 유달리 빛났다.

<내가 뭘 잘못했어? 그게 정말 내 잘못이야?>


<테오.>


<누나. 나는 항상 열심히 살았어. 누나도 알잖아. 나 정말 열심히 살았단 말이야...>

이미 울음이 섞인 목소리에는 비통하고 애절한 목소리가 방울방울 맺혔다. 누나 역을 맡은 배우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며

살짝 떨리는 손으로 아이바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주 훌륭하고 자연스럽게.

-저건 연기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아이바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대본에는 분명 그렇게 하라는 행동 지문이 적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없었다.

저 배우가 그렇게까지 감정연기가 훌륭했던 것도 아니고. 

씬이 바뀌고 다른 주연이 연습실 중심으로 나선 사이, 나는 다시 한 번 대본을 펼쳐 앞의 시놉시스와 배우들의 이름을 천천히 읽어내렸다. 스토리는 그렇게 특출난 것은 없었다. 마을의 빵가게에서 일하는 테오는 누나와 함께 열심히 살아간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는 베이런스 씨의 딸 섬머를 짝사랑하면서. 그런 와중에 테오는 쓰러져 불치병 진단을 받게 되고,

빵가게는 누나에게 맡긴 채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들을 이루어 나가며 인생을 즐기는 그런 이야기다. 
고루하다. 너무나도 고루하지만, 자신은 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에서조차 특별할 것 없는 마을사람의 존재다.

자신은 테오의 가게에서 빵을 한 번 사고, 테오가 미친 짓을 벌일 때 뒤에서 손가락질을 하고,

테오가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 참석하기만 하면 된다. 대사는 얼마나 간단한가.

<식빵 한 덩이 주세요.>,  <왜 저래?>, <테오.> 그렇게 딱 세 번 입을 떼고 나면,

막은 내리고 관객들은 박수를 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테고 말이다. -언제나 똑같았다.
대본을 덮고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여주인공인 섬머를 발견한 테오가 홀로 중얼거리는 장면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농담을 하며 식료품을 건네주는 섬머 역의 배우를 흘깃 바라보던 아이바가, 대본을 한 번 확인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섬머. 정말 이 계절에 어울리는 애라니까. 어떻게 저렇게 빛이 날 수가 있지? 여름 햇살보다 더욱 눈이 부셔.>

-저 대사는 아이바에게 가야 할 게 아니라, 아이바를 바라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가야 할 대사가 아니었을까.

지금 이 순간, 그보다 빛나는 사람이 도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아이바가 내뱉는 애달픈 한숨에 제 옆에 서있던 다른 여배우가 같이 한숨을 따라 내쉬었다.

그의 감정에 동화되어버리고 만 것이겠지. 그럴거다. 연습이라고 해서 아이바는 살살 해주지 않고,

때문에 연습이어도 배우들은 그를 따라 점점 연습을 실전처럼 진행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내려온 이들은 관객이 되어 그 연극을 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이다. 
잠시 쉴게요! 그렇게 말하며 박수를 치는 연출가를 바라보다가 어느샌가 내 옆으로 다가 온 아이바에게 시선을 돌렸다.

쇼쨩, 나 연기하는 거 봤어? 해맑게 웃으며 저에게 물어보는 아이바가 어처구니없어 코웃음을 지으면,

주인에게 시선을 끌려는 강아지 마냥 끼잉끼잉 앓는 소리를 내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안 봤겠어? 아까부터 여기 있었거든."
"어땠어?"
"뭐가 어때. 항상...잘 하지."
"-헤헷."
"뭐가 좋다고 웃어. 주연배우가 자리 이탈해있으면 혼나는 거 몰라? Y 씨가 항상 그러잖아. 주연 배우들끼리 모여 있으라고."
"그렇지만..."
"뭐가 '그렇지만'이야. 자, 가. 가."

극본가인 Y씨까지 들먹이며 이야기를 하자, 금세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나에게 동정을 구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휘말릴 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매몰찬 사람도 아니었기에,

그저 쓰게 웃으며 아이바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달래는 것을 마무리하고 마는 것이다.
풀이 죽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아이바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친한 척 굴지도 않으면서 요즘따라 묘하게 자신에게 친분을 과시한다. 

친분을 과시한다고 해야 할까, 들러붙는다고 하는 게 정확하려나. 뭐, 나야 좋지.

앞으로 풀릴 일만 남은 천재 배우님과 친하다는 인상을 심어두는 건 나쁠 게 없다. 지금은 이 극단 안에서 뿐이더라도,

나중에 그가 더 큰 무대로 진출하게 된다면 나에게도 다른 영광이 돌아올지 모르고 말이다.

"어이, 쇼!"
"아, 네."
"이거 저쪽에 좀 가져다 놔라."
"네? 하지만 저 곧 있으면 연습 시작하는데요."
"뭐? 너 그냥 단체씬에만 나오지 않냐? 다른 애한테 적당히 대사 쳐달라고 해. 굳이 필요 없잖아, 너."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말입니다.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휘적휘적 내젓는 스태프에게 그냥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그런 내 대답에 그제야 만족했는지, 들고 있던 잡동사니들을 내게 떠넘기고는 자신은 다른 곳으로 이동해버린다.

그럴거면 그냥 가는 길에 가져다 놓으면 됐잖아. 그러나 말을 덧붙이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걸,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찌 됐건 빠르게 일을 마치고 다시 자리로 복귀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의 대사는 다른 사람이 쳐주면 되는 게 맞지만-

아이바의 연기를 보는 건 절대 빼먹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아직도 나에게 영광이 돌아오려면 한참은 멀은 것 같다.

 

쇼쨩, 저녁 같이 먹자. 그렇게 말하며 들러붙는 아이바를 제때 떼어내지 못한 탓에 결국 집까지 같이 오고 말았다.

꼼짝없이 배달음식으로 저녁까지 같이 먹고 나니, 얘가 지금 오늘 밤도 잘 부탁한다는 걸 돌려말하고 있는건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돌려말할 애가 아닌데. 아이바 마사키의 안에는 직구 아니면 잘 해봤자 커브 뿐이다.

솜씨 좋게 돌려 말하는 것과 아이바 마사키는 어울리지 않는 행위였다.
미심쩍은 눈으로 가만히 아이바를 바라보고 있는데, 여즉 해맑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제 가방을 뒤적이던 아이바가

무언가를 꺼내어 앞에 내보였다.

"-대본?"
"쇼쨩! 연습하자!"
"...하?"
"연습! 나 이렇게 단 둘이서 연습해보고 싶어서!"
"...아니, 나 마을사람이야. 봤어? 배역명 '검은 옷의 남자'라고. 단 세 마디 있어, 대사."
"아, 아니! 나 그 장면 말고..."
"그럼?"
"...여기를, 해보고 싶어서."

다급하게 제 대본을 펼친 아이바가 다시 내 눈 앞에 대본을 들이밀었다. 너무 가깝게 들이댄 바람에 눈앞이 잔뜩 흐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약간 질린 표정을 지으며 그보다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이리저리 섞이던 글자와 종이가 분리되어 천천히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테오, 섬머의 뒤에서 나타나며-. ...아, 이 장면 알고 있다. 분명...

"섬머에게 고백하는 장면이네."
"응. 여기가 좀 안 되어서."
"헤에. 네가 안 되는 구간도 있어? 로맨스를 안 해본 것도 아니고."
"이 연극만큼은 안되더라구. 섬머가 K 선배라서 그런가?"
"무슨 뜻이야. K선배가 섬머 역에 안 어울린다는 뜻? 너 이른다?"
"아니, 그게 아니라아. ...도와줄거지?"

싫다. 정말 싫다. 내가 도대체 얘가 뭐가 예쁘다고 이런 도움을 줘야 하냐고. 그러나 나는 큰 실수를 하고 말았다.

부탁을 거절하기 전에, 그의 눈을 봐버리고 만 것이다.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가 반짝이며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쇼쨩, 안될까? 물어보는 목소리는 시무룩하고 약간 물기에 젖어있는 느낌도 들었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사람한테 매달리는 거야. 싫다고 해야 해. 내가 왜 이걸 해줘야 해.

그러나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고, 기쁨에 찬 아이바에게 꽉 안기기까지 하고 말았다. 정말, 사쿠라이 쇼, 사람이 너무 무르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내 대본을 가지고 와서 펼쳤다. 어느새 내 옆에 앉은 아이바가 자신의 대본을 펼쳐 들었다.

아아, 주연이 되고 싶단 꿈은 있었지만-첫 연습을 여주인공으로 할 줄은 몰랐는데.

멈추지 않는 한숨을 겨우 꿀꺽 삼키며, 나는 잘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가 되었단 소리였다.

<안녕, 섬머.>


<어머, 테오. 안녕. 오랜만이야. 요즘 많이 바쁜 것 같더라?>


<응. 어쩔 수 없었어. 하고 싶은 게 많았거든. 많은 걸 했어.>


<어떤 걸 했어?>


<슈밀턴 할머니네 과수원에서 사과를 하나 따먹었고, 해링턴 집의 말을 타고 뒷산까지 갔다 왔어.

빵반죽을 숙성시키지 않았고, 모카빵에는 건포도를 넣지 않았어!>


<재밌는 일들을 했네. 어쩐지 테오랑은 안 어울리는 일들이지만.>


<그리고 이 마을에서 하고 싶은 일이 한 개 남았어.>


<뭔데?>


<섬머, 너와 클레어 호수에 놀러가는 거야.>


<나하고?>


<응. 너랑 나, 단 둘이만. 우리집에서 갓 만든 빵을 도시락으로 챙겨 가는 거야.

너는 우유를 챙겨오면 될 거고. 호수에 도착하면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점심을 먹자.

뜨거운 여름 해가 나무의 정수리에서 우리를 내려봐도, 느티나무의 무성한 이파리와 큰 가지들에 가려서 제대로 볼 수 없겠지.

그러면 우리는 푹 쉬었다가, 햇살이 수면에 반짝이는 호수에 발을 담그는 거야.

클레어 호수는 8월에도 차가운 거 알지? 발목까지 담그면 발갛게 익은 볼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시원해질 거야.>


"어, 잠깐만...잠깐만. -아, 여기다."

<너무 즐거운 생각인걸! 하지만 나는 가게를 지켜야 해. 가게를 지키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혼이 날 거야.>


<섬머. 너에게 어울리는 건 파란 하늘과 뜨거운 햇살, 그리고 반짝이는 호숫가야. 이 어둡고 오래된 가게의 계산대가 아니라고.>


<우리 가게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미안, 미안. 하지만 섬머. 내 말을 들어봐. 미안, 삐지지 말아줘. 섬머. 아아, 섬머.>

대본에 눈을 박고 겨우 따라가는 탓에 아이바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아마 아이바는 사랑에 빠진 테오의 얼굴을 완벽히 그려내고 있으리라.

귓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아이바의 목소리만으로도 잘 알 수 있었다.

어딘가 달콤한 숨을 머금고, 서투르지만 직설적으로 섬머를 유혹하는 그 말에 내가 섬머라도 된 마냥 심장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이래서 천재의 상대역은 싫다. 버거웠다. 말려들거라는 건 잘 알았다.

나의 부족한 능력이 적나라하게 내보여질 것이 뻔했으므로. 그래서 연습이어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참으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저 녀석에게 너무 집중하느라, 대사를 놓칠 뻔 했다.

그러니까 어디 보자. 지금 이 구간이-.

그러나 내가 대사를 찾기도 전에, 갑자기 뻗어 나온 아이바의 손이 내 얼굴을 붙잡았다.

갑작스럽게 닿은 뜨거운 체온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면, 새까만 눈을 한 아이바가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의 얇지만 선이 보기 좋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사랑해.>


"...잠, 잠깐만. 아이바."


<사랑하고 있어. 이 계절보다 더욱 뜨겁게. 도대체 누가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할까. 너 자신보다 내가 너를 더욱 사랑할거야.>


"아이바, 이거 놔..."


<섬머. 나의 섬머.>

잠깐만, 이거 분명 다음이-...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을 꽉 감아버렸다.

그리고 내 예상에 걸맞게, 아이바는 그대로 내 얼굴을 끌어다가 조심히 입을 맞추었다.

처음에는 그저 서투르게 닿기만 하는 키스. 살짝 한 번 떨어졌다가, 두번째는 조금 더 거칠고 짙게.

얼마나 집중했는지 혀를 내밀어 내 입술을 핥으며 조르는 아이바를 발로 차버릴까 고민하다가 그냥 살짝 틈을 만들어 주었다.

내 입술이 열리기 무섭게 제 혀를 입 안에 밀어넣으며 그대로 나를 끌어안아 제쪽으로 당긴다.

얘 진짜 무대에서 이런 키스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꽤 오랫동안 키스하던 아이바가 천천히 얼굴을 떼어냈다. 타액에 젖은 입술이 떨어지며 쪽, 하는 야릇한 소리를 냈다.

잔뜩 젖어 반짝이는 입술을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지으며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너 무대에서 이러려는 건 아니지?"
"...나도 알아. 이렇게까진 안해."
"너 딱히 목적이 연기연습 아니지? 별로 어색할 것도 없던데."
"-원래는 진짜 연습하려고 찾아온 건데...쇼쨩이 상대라 그런가 다 잘되네."
"뭐라는 거야."
"쇼쨩."
"...왜."
"나 자고 갈래."

그렇게 말하는 아이바의 눈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딘가 굉장히 다급한 것처럼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엄청나게 뜨거운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으며 당장 자신을

허락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이런 노골적인 아이바는 처음 본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종일 고개를 끄덕이는 인형이 된 기분이다.

그리고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아이바는 다급하게 다시 내 입술에 제 입술을 붙였다.

그가 나를 섬머라고 부른 기분이 들었다.

 

맴맴, 매앰. 크게 들리는 매미 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저번에 들었을 때보다 훨씬 크고 선명하게 들렸다.

이 근방에 자리를 잡은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훔쳤다.

예산을 아낀다더니 이젠 에어컨도 틀지 않나보다. 아니면 온도를 확 올려서 틀었다던가. 그렇게 틀거면 차라리 선풍기로 도배라도 하지.
대본으로 부채질을 해봐도 더운 바람밖에 나오지 않는다. 바닥에 널부러진 T선배와 거울에 기대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A,

그리고 건너편에서 벽에 달라붙은 다른 배우를 쭉 훑어보다가 나 또한 바닥에 내려앉았다.

땀에 젖은 의자는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었다. 아, 젠장. 에어컨 좀 틀어달라고! 우리 그렇게 적자야? 외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으려니,

결국 참을성 없는 T선배가 버럭 외쳤다. 에어컨 틀어줘! 역시 저 사람의 저돌적인 성격은 장점이자 단점이다.
그러던 와중에 문이 열리더니 잔뜩 짜증난 표정의 O가 연습실로 들어왔다.

평소 온화한 성격의 그가 이렇게까지 험악해질 일은 거의 없는 탓에, 괜히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 있는건가 싶어 슬쩍 물어보려던 순간, 아니나다를까  T선배의 다급한 오지랖이 냅다 O에게 들이박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저 배역 잘렸어요."
"뭐? 잠깐, 너 이번에 이름 있는 역 아니야? 이제 극 오르려면 얼마나 남았다고 역을 잘라?'
"저희 후원업체 있잖아요. 거기서 저를 다른 사람으로 바꿔달라고 했대요."
"그럼 진즉 교체했었어야지! 연습도 다 진행된 판에!"
"어차피 조연이니까 괜찮지 않냐고, 그렇게 말을...윽..."

결국 눈물을 보이는 O에게 당황한 T선배가 다가가 O를 달래주기 시작했다.

덩달아 눈물을 머금은 A 또한 O의 곁으로 다가가 울지 말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나? 머리가 멈춰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나보다 반년 먼저 이 극단에 입단한 O는 요 근래 겨우 이름이 있는 배역에 캐스팅되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아이바가 있는 한 조연이었지만, 나처럼 이름도 없고 특징으로만 불리는 마을사람 같은 조연에 비하면

꽤 비중도 있고 대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조연이었나보다. 후원업체의 말 한 마디에 바로 교체되어도 상관 없는 그런 사람들.

나보다 능력도 좋고 처신도 잘 하는 O도 저런 판국에-나는? 나는 과연 이 곳에서,

무대에 올라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꿈은, 과연 내게는 어울리는 것이었을까?
생각은 많았고 시간은 빨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연습실은 텅 비어있었고, 창 밖으로 보이는 날은 점점 저물고 있었다.

그래도 여름 초입이라 해가 길어진 탓인지 확인한 시간에 비해 하늘은 아직 밝은 축에 속했다.

너무 생각을 많이 한 탓에 머리가 띵하다. 땀을 많이 흘린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고.

오늘은 일단 돌아가는 게 좋겠다, 싶어 가방을 챙겼다.
연습실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서려다가 반대쪽 연습실에서 나오는 아이바와 마주쳤다.

오늘 얘도 여기 있었구나, 싶어 인사를 하려다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이토록 더운데, 아이바의 몸은 땀에 젖은 흔적 하나 없이 그저 뽀송하기만 했다.

한 번도 땀을 흘린 적이 없다는 듯이. 

"어, 쇼쨩!"
"...아이바. 너 안 더워?"
"어? 지금? 연습실에 에어컨 너무 세게 틀어서 추울 지경이야!"

그렇게 말하며 웃어보이는 아이바의 뒤로, 굳게 닫힌 연습실의 문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오늘 주연배우들은 별도의 연습실에 모여 그들끼리만 연습하기로 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 외의 조연들은 저쪽의 큰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말이다. 나는 큰 연습실 행이었고, 아이바는 별도의 연습실 행이었다.

맴맴맴. 저녁인데도 매미들이 목이 터져라 울어댔다. 문득 나는 매미는 자신의 성량 때문에 소리를 못 듣는다는,

어떻게 되어도 쓸모없는 지식을 떠올렸다. 아마 일종의 현실도피였을 것이다. 비루하고 어두운 내 현실을 깨닫는 것보다는,

그것이 더욱 나의 정신 건강에 좋았을테니까.
그 자리에 서서 눈을 깜빡이는 내가 이상했던건지, 아니, 실제로 이상했을테지만-아이바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내 앞에서 얼쩡거렸다. 아아, 싫다. 꼴도 보기 싫다. 이 녀석만 아니었더라면, 이 녀석만 없었더라면. -없었더라면? 얘가 없으면, 내가 뭐가 되는데?

얘가 없어도 나는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그 화려한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었다.

천재가 있기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본다는 것은,

그냥 일종의 자기위안이었다. 천재가 있으니 어쩔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며 나 자신을 위로하던 지난 날이 수치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저기, 쇼쨩..."
"있지, 아이바."
"응?"
"나 그만 두려고."
"...뭐?"
"여기도 그만 두고, 배우도 그만 둘거야."
"...쇼쨩?"
"그리고, 너랑 그짓거리 하는 것도-전부 그만 둘거야."

그래, 전부 그만 두자. 그만 두게 해줘. 날 편하게 해줘. 나는 이제 편해지고 싶었다.

꿈을 꾸느라 바빴던 어린 아이는 이제 묻어둘 때가 되었다. 나는 이제 성인이 된지 오래였고, 이 길은 내 길이 아니었으며,

그로 인한 심술로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못할 짓이다. 딱히 괴롭힌 건 아니었지만,

뭐. 그래도 앞으로 잘 나갈 길만 남은 애한테 스캔들이 될 요소로 남고 싶지는 않으니까,

인지도가 더욱 올라가기 전에 모두 정리해버리는 것이 옳았다. 
내 10대의 전반을, 그리고 20대 초반을 여기에 쏟아부었지만, 그냥 여기서 그만두기로 했다. 아직 난 젊었고, 세상에는 할 일이 많았다.

꼭 이 일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분명 다른 일을 한다 하더라도 연극은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토록 꿈꿔왔던, 무대 위의 주인공은 될 수 없겠지만-내가 연극을 계속한다 해도 그 꿈이 이루어질 가능성 또한 없다.

그럼 차라리 한 발자국 물러나서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 나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도망쳤다고는 해도, 그 누가 나를 비난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연극을 그만 두겠다고 결정하고 나면, 펑펑 울어버릴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입밖으로 그 말을 내뱉고 나니

오히려 편안해진 기분이었다. 속이 시원한 것 같기도 했고, 심장이 아픈 것 같기도 했다. 혼란스럽지만 개운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선택을 했다는 생각이 온 몸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허탈한 통쾌함 때문에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 삶을 부정했지만,

그 부정이 올바르다고 받아들인 내 자신이 기분 나빠서.
이왕 결정한 거, 단장에게도 말하고 가기로 했다. 그때의 스태프가 말했듯이,

내 역할은 개막 전 바로 다른 사람으로 바꿔친다 하더라도 별 문제가 없는 역이었으므로. 그런 경우도 허다했고,

딱히 문제될 일도 없을 것이다.

극을 올리지 않았으니 정산할 일도 없었고, 내 기억이 맞다면 계약의 갱신도 1주일이 남은 상태였다.

지금이 그만둘 적시라고 누군가 내 귀에 속삭이는 듯 했다. 그래서 나는 그대로 아이바의 옆을 지나쳐 연습실로 향했다.

아마 단장은 거기 있을 테니까.

"쇼쨩."

생전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에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 목소리는 한없이 낮았고, 거칠었고, 조용했으며-소름끼칠 정도의 끈적함을 숨기고 있었다.

어느샌가 뻗어진 손이 내 손목을 잡고 있었다. 내 손보다 조금 더 크고 뜨거운 손이,

빈틈없이 내 손목을 감싸고 있는 그 모습이 어쩐지 이상할 정도로 멀어보였다.

어라?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빨간 경고등을 억지로 무시하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이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이바의 까만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숨이 멎었다.

남들보다 커다란 눈동자는 빛 한점 들지 않을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으므로.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소리를 왜 해."
"...아, 이바?"
"쇼쨩 나랑 무대 위에 있어야지. 갑자기 왜 다 그만 둔대."
"잠, 잠깐만...이거 놔줘..."
"연기 그만 둔다 해도-나랑은 왜 정리하겠다는 건데? 내가 쇼쨩에게 그 정도인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어느새 다른 팔까지 붙잡혀 거의 아이바의 코앞까지 끌려가고 말았다.

당황한 내가 마구 뒷걸음질을 치며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무지 아이바의 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얘가 이렇게까지 힘이 셌나? 옷을 벗었을 때 꽤 근육이 탄탄한 건 알았지만, 그와 별개로 그래도 많이 마른 몸이었기에

이렇게까지 힘이 셀 줄은 몰랐다. 침대 위에서 힘이 좋다고 느꼈던 건, 그냥, 내가 그렇게 느끼는 줄 알았던 거고.
완전히 제 쪽으로 당기려는 것을 겨우 밀어내고, 그나마 잡혀있던 손목을 한 개 빼낼 수 있었다.

아이바의 새까만 눈동자는 일말의 미동도 없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분위기는 점점 태풍을 만난 바다처럼 거칠게 풍랑이 일어나고 있음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본능적인 위협을 느껴서-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이러지 마. 아이바."
"...."
"너, 나랑 아무 관계도 아니야. 알잖아."
"-...쇼쨩."

"우리 그냥, 그냥 마음 맞아서 그랬던 것 뿐이잖아. 그래, 알았어. 내가 미안해. 그 날 내가 너한테 손대지 말았어야...잠깐, 아이바!"

나는 그 순간 아이바의 눈 너머, 그 깊은 어딘가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아무리 단순해보여도 아이바 마사키는 결국 사람이었다. 내가 쉽게 해석하고 읽어내릴 수 없는,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그런 가십거리가 아닌-개별적인 성장환경과 복잡하면서도 별도의 신념 등이 확고하게

자리잡은 그런 평범한 사람. 그리고 나는, 지금 나로 인하여 그가 엄청난 상처를 입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집까지 오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이라곤, 하늘을 물들인 붉은 노을과,

다 저물었음에도 여전히 눈을 찌를 법한 뜨거운 여름 햇살, 평생을 해맑게 빛날 것이라 생각했던 남자의 밤하늘 같은 눈, 그리고-.

"쇼쨩..."
"아, 아이바. 잠깐, 응..."
"제발, 쇼쨩..."

우는 목소리로 비는 주제에, 억지로 내 입술을 여는 그 행동은 멈추지 않고 여전히 나를 괴롭힌다. 벽에 문질러진 등도 아프고,

붙잡힌 손도 아프고, 계속 핥아진 입술이라든가, 깨물리는 혀도 욱신거리며 아픔을 호소한다. 그러나 제일 아픈 것은,

그런 나에게 빌고 빌면서도 내가 무슨 말을 할까 두려워 어떤 말도 하지 못하게 계속 몰아붙이는 아이바 마사키였다.
계속 되는 키스에 숨이 막혀 몸을 뒤틀면, 그제야 조금 뒤로 물러나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덜걱이는 숨을 억지로 가라앉히다가 마른 기침을 토했다. 쿨럭이며 몸을 떠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이바가 천천히 내 볼을 매만지다가 울먹이는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냥 모든 걸 내버려두고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쇼쨩, 제발...나 버리지 마. 응?"
"...아이바..."
"제발,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할게. 그러니까 나랑 계속 같이 있어줘."
"...내가, 원하는 거..."
"쇼쨩이 원하는 거, 전부. 전부 해줄게. 응?"

다시 말하지만, 아이바는 참 사람이 좋다. 그래서 이런 말도 함부로 한다. 나같이 못된 사람에게 걸리면 어떡하려고. 나처럼 못되고,

심술궂고, 재능도 없는 주제에 사람을 들었다 놓기만을 반복하고, 피해의식이 가득한-. 겨우 숨을 다잡으며,

천천히 아이바의 눈을 마주쳤다. 까만 눈동자는 조금 빛이 돌아왔지만, 딱 그만큼 노골적인 초조함과 두려움을 내보이고 있었다.

내가 없으면 죽기라도 할 것마냥. 내가 자신의 빛인 마냥 말이다. 그래서였을까, 다 내버리겠다고 생각한 욕망이 조금 고개를 들었다.

어차피 되지도 못할 거, 나도 망하는데 얜 왜 잘나가야 하냐는 아주 못된 심보가 은근슬쩍 그 존재를 드러냈다.

그래서 나는 입을 열었다. 그 날 뒷풀이 회식 자리에서 아이바에게 제안했던 것과 똑같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작게 목소리를 깔고.

"그럼...너도 연기 그만 둬. 나랑 같이, 도망쳐버리자."
"-그래, 알았어. 그럴게. 나도 그럴테니까."

두 번의 생각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바의 뒤로 완전히 새까매진 하늘이 보였다. 맴맴, 매애애앰.

여전히 시끄럽던 매미가 마지막 목청을 울렸다.

제 울음소리도 못 듣는 주제에 크게 고함을 지르는 것이 어쩐지 우스워서, 나는 눈을 감고 아이바에게 키스했다.

[가리] @ss012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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