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이었다
아이바 마사키 X 사쿠라이 쇼
*비속어
*설정이 뒤죽박죽입니다.(ex.하교 시간은 일본 기준 오후 4시).
아침인데도 내리쬐는 뜨거운 햇살, 조금 걷기만 해도 팔꿈치 뒤쪽과 무릎 뒤편이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그래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어디냐. 습해서 몸이 물을 먹은 것 마냥 무거워지는 것보다는 몸의 수분을 다 빼앗아버릴 듯 뜨겁게 타오르는 편이 좋았다. 아니 근데. 씨발, 사실은 어느 쪽이든 싫었다. 여름이었다. 뒤에 갖다 붙이면 어떻게든 말이 된다는 마법의 말이라던가.
아닌가 씨발. 기억을 해내려 머리를 굴리는 동안에도 단단한 두개골 속 톱니바퀴가 열을 뿜어내는 것 같아 금방 생각을 멈추었다.
대신 입 안으로 가볍고 천박하기 그지없는 두 음절을 계속 요리조리 굴렸다. 오히려 이쪽이 마법의 말 아닌가. 씨발.
아이바는 겨울에 태어난 주제에 남들보다 몸에 열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남들보다 여름을 더 고통스러워했다.
그렇다고 해서 겨울에는 따뜻하냐? 그것은 또 아니었지만서도. 겨울은, 뼈가 아릴 듯 찬바람이 몰아쳐도 근육돼지 코스프레라도 하는 것 마냥 하염없이 껴입으면 괜찮았으니까. 그에 비해 여름은 자비라고는 없다. 무슨, 벗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살가죽을 벗겨낼 수도 없고. 교복 하복은 왜 반바지가 아닌 걸까. 나름 각선미도 새끈한 편인데. 아이바 자랑인 하얗고 고운 다리를
발목까지 가린 새까만 교복바지가 전철역이 만든 그늘 안쪽으로 스며드니 헛된 생각이 다시 시작됐다.
헛된 생각이 시작되니 최근에 새로 생긴 취미 생활이 떠올랐다. 오늘도 같은 칸일까.
아이바는 숨통 트이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매일 아침 같은 전철을 타는 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이 더운 여름날 춘추복 셔츠를 입고 등장한 아이는 심지어 장갑도 끼고 있었다.
그 장갑 낀 손에는 작정이라도 한 것 마냥 화려한 색과 무늬의 양산이. 같은 칸 전철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쪽을 향했다가 동시에 제자리로 돌아갔다. 미친놈이다. 혹시나 얽히기라도 하면, 좆된다. 똑같은 얼굴을 하고서.
눈에 익숙한 교복은 분명 같은 학교의 것이었다. 셔츠 아래로 살짝 보인 하복의 명찰 색깔은, 아이바와 같은 색이었다.
저런 미친놈은 본적이 없는데.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시선을 느꼈는지 그 아이는 아이바를 바라봤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하하, 웃었다. 아이바는 웃느라 접힌 저 눈 사이에 끼어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이쁜 애는 본적이 없는데, 갑자기 억울해졌다. 타이밍 좋게도 정면으로 본 에어컨 바람이 아이바의 앞머리를 가르듯 흩뜨렸다.
마치 봄의 첫사랑을 그린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라고 아이바는 약간 과장을 섞어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 아이의 양산 색깔 같은 진한 분홍색의 벚꽃이 흩날렸던 것 같기도 하고. 여름이니까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이바가 혼자 거짓말을 하던 쌈바를 추던 전철은 달려 어느덧 학교에 도착하기 세 정거장 전이었다. 문이 열리면, 그 아이가 들어왔다. 이제는 처음 이 칸에 오른 이들 외에는 별 관심조차 주지 않는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친밀감을 느끼기도 잠시,
전철은 목적지에서 아이바와 분홍색 양산을, 그리고 한 무더기의 사람들을 더 뱉어내고 가벼워진 몸으로 선로를 따라 내달렸다.
다시 햇살이 내리쬐는 등굣길이었다. 회색 아스팔트 위로 양산의 크기만큼 새카만 동그라미가 새겨졌다.
왠지 조금 시원해진 것 같은 기분이야, 아이바는 천천히 그 뒤를 따라서 걸었다.
짧게만 느껴지는 등굣길이 아쉬웠다. 여전히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이었다.
"니노-. 나도 양산이나 쓰고 다닐까. 그럼 덜 더울까?"
"미친놈, 그럼 내 것도 사주라. 샛노란 색으로 부탁해."
"아, 이번 달 용돈 다 썼는데."
"미친놈이 아니라 그지새끼였네. 그럼 어? 사쿠, 크흠 실수, 공주님한테 빌려달라고 하던지."
분홍색 = 공주님 이라는 아주 단순한 별명을 니노미야는 그 아이에게 붙였다. 남학교에서 공주님이라니 편견이 없는 놈인지
뿌리박힌 놈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같은 학교, 그것도 같은 학년에서 분홍색 양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을 찾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었지만 아이바는 제 말을 듣자마자 아는 체를 하는 니노미야의 입을 두 손으로 막았더랬다.
새끼, 로망이 없어 로망이. 원래 이런 만남은 말야 우연히 알아가야 하는 거라고. 떨어트린 학생증을 우연히 줍는다거나.
전철 안에서 쏠린 몸이 우연히 내 쪽으로 기울어진다거 그런 거라고. 니노미야는 또 무슨 영화를 본 건지 헛소리를 하는
친구라는 놈의 입을 잡아서 매버릴까 생각하다 그만뒀다. 어째 이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애매한 시기를 선택한 것인지.
여름이 시작하자마자 전학을 온 사쿠라이를 모르는 것은 학교 안에서 아이바가 유일했으니까.
평소 관계없는 남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의 성정 탓이었다. AB형이라 그렇다고 그랬던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내뱉은 변명도 무척이나 AB형웠다.
그런 AB형 인간 아이바의 결심은 매점에 가기 위에 뒷문으로 나섰다가 바로 옆 반인 오노를 마주침과 동시에 허무하게도 무너졌다.
빳빳하게 잘 다려진 하복을 입은 오노는 춘추복 셔츠를 하복 위에 걸친 남자와 함께였다.
아, 혹시 나 모르게 저런 차림이 유행하는 건가.
아이바는 남자의 뒤통수가 참으로 동그랗다는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 쇼짱, 숙제 한 번만 더 보여주라."
"어제 말했지? 이제부터 돈 받을 거야."
"에-. 아아!, 그럼 얘는 처음이니까 공짜로 보여주는 거지?"
"어?"
"아이바, 아이바. 여긴 나랑 같은 반에 사쿠라이,"
으아아악! 이미 다 들은 마당에 의미도 없이 듣지 않겠다는 듯 아이바는 소리를 지르며 복도를 내달렸다.
복도에서 뛰지 말라는 선생님의 잔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아이바를 막을 수는 없었다.
왜 다들 나의 영화 같은 만남을 방해하려는 거지? 사쿠라이? 이름도 본인답구만! 아냐, 무슨 소리야 나는 이름 못 들었어.
그렇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분명 그거 미친놈 취급 받았을 거야. 차마 아이바의 앞에서 내뱉지 못했던 말을 니노미야는 혼자 머릿속에서만 중얼거렸다. 니노미야에게 들어 사정을 알게 된 오노는 그딴 시답잖은 것 때문에
제가 사쿠라이의 숙제를 포기해야했냐며 짜증을 냈다.
옆에서 함께 고개를 끄덕이던 마츠모토는 그런 오노를 한심한 눈으로 보며 혀를 찼다.
숙제는 스스로 하는 거야. 아주 당연한 태클과 함께. 세 사람은 내기까지 벌였다.
영화 같은 우연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며 사쿠라이는 졸업할 때까지 공주님으로 불린다에 표 세 개 몰빵.
내기가 안 되잖아, 바로 아이바의 뒤에서 킬킬대며 웃었다. 당사자는 못들은 척 보지도 않는 교과서에 머리를 푹 박아 넣고 꿍얼꿍얼
불만을 터뜨렸지만. 그렇게 버팅기던 아이바가 공식적으로 사쿠라이와의 첫 대면을 인정한 것은 정말 놀랍게도 그 염원대로였다.
학교 복도 대리석 바닥에 탁 소리를 내며 떨어진 것은 분명 사쿠라이의 학생증이었다.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바로 뒤에 있던 마츠모토.
자연스레 주워서 그 주인인 사쿠라이에게 돌려주려는데 누군가 뒤쪽에서 우다다 마츠모토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마츠모토의 유일한 약점은 후방에서의 공격이었다. 기겁을 하며 학생증을 다시 떨어트리니 익숙한 손이 그것을 주워들었다.
학생증은 쳐다보지도 않고 아이바는 공주의 이름을 불렀다. 뒤돌아보는 얼굴이 생긋 웃었다.
다시 한 번 아이바는 그 눈웃음에 끼어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사, 사쿠라이 이거! 학생증! 떨어트렸어!!"
"아, 고마워 아이바."
"나, 나 이름 아, 아이바 마사키!"
"오노 말대로 진짜 독특하네. 아이바짱이라고 불러도 돼?"
"결국 학생증은 보지도 않았잖아.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거야? 쇼, 이 미친놈 상대해주지마."
마츠모토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사쿠라이와 아이바의 사이를 팔로 가로막은 채 아이바를 째려봤다.
하품을 하며 느지막하게 교실에서 나온 오노가 마츠모토의 심기 불편한 얼굴을 보고 아이바의 옆구리를 푹푹 찔렀다.
쟤는 왜 얼굴로 쌍욕을 하고 있어? 웅얼거리며 쳐다본 아이바의 얼굴은 가득 미소를 머금고 햇살 아래의 수면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 오노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렇구나 도S랑 도M인가. 간단한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아무 것도 못 봤다는 것 마냥 이동 수업을 위해 마츠모토와 사쿠라이 두 사람의 허리에 팔을 걸고 이끌었다.
아이바는 그 동그란 머리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벅차오르는 마음을 거친 숨소리로 마음껏
드러내고서 반에서 얌전히 게임기를 두드리고 있던 니노미야에게 쿵쿵 발자국 소리를 내며 다가갔다.
잔뜩 흥분해서는 혼자 콧김을 내뿜고 떠드는 것이 니노미야의 넓은 시야에 들어왔지만
니노미야는 가만히 게임기의 볼륨을 높일 뿐이었다. 아, 이 판 보스랑 비슷하게 날뛰고 있네.
보스는 용사 니노미야의 초절정 강한 광선검 공격을 맞고 반 토막이 나서 죽었다.
그제야 게임기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드니 아이바의 얼굴이 정말 코앞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니노미야의 소리 없는 비명이 목구멍 안에서 울렸다. 씨발! 존나 놀랐잖아! 뭐야! 동시에 아이바의 옆통수가 작은 손바닥으로
가차 없이 구타 당했다. 갑작스러운 큰 소리에 반 아이들이 웅성웅성 반쯤 장난을 섞어 싸워라 싸워라 연호하기 시작했다.
아이바는 맞은 관자놀이를 우는 소리를 내며 쓰다듬다가 다시 헤실헤실 웃어댔다.
에이 뭐야, 흥미가 사라진 듯 반 아이들은 순식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니노. 사쿠라이랑 친구야?"
"아. 그런 셈인가? 근데 마츠준이랑 오노가 더 친하지. 같은 반이잖아."
"나도 나도 끼워줘-"
"넌 친구자리를 노리는 게 아니잖아. 그런 불순한 마음으로 우리 쇼짱한테 접근하려고 하다니."
"우리 쇼짱? 너 이 니노미야 새끼! 다들 치사빤스야! 진짜! 나만 빼고 사쿠라이랑 친해지고!"
"등신아 니가 쓸데없이 고집 부려서 그런 거잖아."
"아!! 딱 한번만-, 한번 만요 하나님 부처님 맹자님 공자님 니노미야님-!!"
"..원래 이때까지 오노랑 마츠준이랑 쇼짱 셋이서 급식 먹었어. 근데 오늘 급식 맛없어서 나랑 오노랑 마츠준은 매점 갈 거야.
쇼짱은 비빔밥 엄청 좋아해. 그래서 매점 안 가고 급식 먹을걸."
"갑자기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왜 너네끼리 먹어! 그럼 나는?"
진짜 등신새끼냐. 한심하게 저를 쳐다보는 니노미야의 죽은 눈을 한참 바라보던 아이바는 그제야 깨달은 듯 책상을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렸다. 빨갛게 되어버린 손바닥으로 니노미야의 두 손을 감싸 잡았다. 안 그래도 높은 체온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오늘부터 니노 네가 내 부모다! 아이바의 효심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니노미야는 방금 결정된 사항을 대충 정리해
오노와 마츠모토에게 문자를 보냈다. 두 사람에게 보낸 문자의 답장은 단 하나였다.
'내가 왜.' 마츠모토는 아직 아이바에게 화가 나있었다.
오노는 문자를 보고 그냥 무시해버린 것이 분명했다. 아이바의 친구 농사 결과는 아직 여름임에도 훤히 보였다. 아주 흉작이었다.
니노미야는 이 비보를 아이바에게 전하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이바 부모님, 아무래도 저는 마사키의 부모가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수업시간 종이 힘차게 울렸다. 아이바는 수업 내내 히죽히죽 기분 나쁘게도 웃었다.
"니노..이게 뭐야..?"
"뭐가?"
"오늘 비빔밥이래 맛있겠다 그치."
"응, 나 벌써 군침 돌잖아. 좀 늦게 가서 밥 많이 받을까?"
"그거 위험이 너무 크지 않아?"
"니노 이게 뭐냐니까"
"..몰라 임마, 니 평소 행실을 탓해."
마츠모토는 작정한 듯이 아이바가 사쿠라이에게 말을 걸려하면 그의 발언 기회를 빼앗았다.
주인 잃은 강아지 마냥 시무룩해져서 밥만 우걱우걱 먹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사쿠라이도 마음이 쓰였는지
제 식판에 있는 김치 몇 조각을 아이바의 식판으로 옮겨주었다. 어, 쟤 꼬리 흔든다. 안 보여? 지금 주인이 먹이 줬다고 난리 났는데.
무덤덤한 오노의 말에 사쿠라이가 그래도 사람을 개 취급하는 건 좀 아니지. 하며 아이바의 얼굴을 보는 순간 푸하학, 웃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제가 준 것이 김치가 아니라 다른 무엇이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아이바는 행복해 보였다.
아이바는 사쿠라이가 저를 쳐다본다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또 고장이 났다. 숟가락으로 입 근처까지 퍼 올린 비빔밥이 우수수
다시 식판으로 떨어졌다. 다시 킥킥 사쿠라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이, 우, 에, 오. 말을 붙여보려 입이 벌어졌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니노미야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는 사쿠라이의 식판을 가리켰다. 이럴 수가 식사가 끝나기 직전이었다. 아이바는 자리에서 벌 일어났다. 식탁 아래에 허벅지가 부딪혔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호흡을 한번, 눈을 부릅뜨고 사쿠라이를 바라보았다.
"오늘 집 갈 때 같이 가자!"
"어? 맨날 둘이 같이 가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 그건 같은 방향이라 내가 따라간 거고!"
"저기요 범죄의 냄새가 나는데요."
"으..아무리 친구지만 기분 나쁘다. 쇼짱 거절해버려."
"..아, 음 네가 괜찮으면 나도 좋아."
어째 떨떠름한 사쿠라이의 반응에 니노미야와 마츠모토는 아이바의 눈치를 봤지만 그런 것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마냥 기뻐할 뿐이었다. 괜찮은 걸까. 공중에서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했다.
오노는 벌써 다 먹은 식판을 들고 저 멀리 멀어져가고 있었다.
팡, 분홍색 양산이 펴졌다. 여름은 낮이 길어 학교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햇빛은 수그러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스팔트 위에 그려진 새카만 동그라미는 사쿠라이 혼자만의 공간이었지만 오늘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아이바의 존재 때문이었다.
항상 뒤에 붙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둘이 붙어서 같이 돌아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조잘조잘 뭔가 말을 붙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봤자 양산 탓에 거리는 가깝다고 볼 수 없었지만.
조잘조잘 의외로 아이바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사쿠라이는 가던 발을 멈추고 아이바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나는 네가 날 부끄러워하는 줄 알았어."
"하? 그럴 리가 없잖아!"
"항상 같은 전철을 타는데 아는 척을 안 하니까."
"아냐 아냐, 진짜 아는 척하고 싶었어! 근데,"
"그런데?"
"..그, 그러니까 하나도 안 부끄럽다고! 바보! 양산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려고 했단 말이야. 진짜야! 니노한테 물어봐!"
"진짜? 이거 안 이상해?"
"응! 그래도 좀 더워 보이긴 해."
세상에는 다양한 알레르기가 있었지만 햇빛에도 알레르기가 올라온다는 것을 아이바는 그제야 처음 알았다.
사쿠라이는 그 때문에 한여름에도 긴팔에 긴바지를 입고 다녀야 한다고 조금 짜증을 섞어 말했다.
조금 삐죽 튀어나온 입술이 말랑말랑할 것 같았다. 아이바는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그럼 여름 별로 안 좋아하겠다.
그럼 사쿠라이는 아니, 사실 여름을 제일 좋아해. 아이바는 급하게 노선을 변경했다. 와 잘됐다 나도 여름 진짜 좋아하거든!
아이바의 등 뒤로 거짓말을 벌하듯 뜨거운 햇살이 닿았다. 정말로 양산을 사야할지도 모르겠다. 이왕 사는 거 커플로 사야지.
사쿠라이는 여름이 뜨거워서 좋다고 했다. 하늘도, 땅도 사람들도 모두 뜨거워지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런 꼴이라 여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니 더욱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이바가 뭔가 말하려는데 사쿠라이는
갑자기 안녕을 고했다. 퍼뜩 정신을 차리니 눈 깜짝할 사이 사쿠라이가 내릴 역이었다. 전철은 도대체 언제 탄 거지?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간 적이 없었다. 아이바짱 내일 봐-. 아이바는 떨어질 정도로 팔을 흔들어댔다.
내일도 이렇게 보는구나. 감격스러움도 잠시 아이바는 사쿠라이와의 대화를 되새겨보았다.
사쿠라이는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쿠라이에게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됐다. 아이바는 생각했다.
사쿠라이가 자유롭게 여름을 즐길 방법을 생각했다. 아이바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얼마 없는 용돈을 털었다.
집에 도착해 씻으려 교복을 벗던 사쿠라이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불길함의 징조였다.
다음날 아이바는 잔뜩 신이 나서 가방을 챙겼다. 얼마나 신이 났냐면 기상 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기 무려 30분 전에 깨어났다.
평소라면 짜증을 내며 다시 잠자리에 들었겠지만 후다닥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여유롭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딸기향 바디 워시를 아까운 마음도 없이 쭉쭉 짜서 바디 타올에 넘칠 정도로 거품을 내고
샤워를 했더니 교복을 입어도 상큼한 향기가 뿜어져 나왔다.
평소에는 쓰지도 않는 안방 화장대의 거울을 보고 공들여 뽀송뽀송해 머리를 빗고 있으니
어머니가 지나가다 한 마디를 했다. 너 미쳤니? 네 미쳤거든요. 다녀오겠습니다! 정확히 매번 나오던 등교시간이었다.
아, 이래서 멋쟁이들은 준비 시간이 오래 걸리는구나. 아이바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느끼며 전철에 올랐다.
흐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쿠라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이바짱..너.. 선글라스 끼고 나온 거 알아?"
"응! 어때? 좀 멋지지 않아?"
아이바를 바라보는 사쿠라이의 얼굴이 어두웠다. 표정이 어두운 게 아니라 색깔이. 선글라스의 탓이었다.
사쿠라이는 비죽비죽 삐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웃어주는 건 좋은데 하얀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쉬웠기에
아이바는 선글라스를 올려 머리띠 마냥 머리 위에 꽂았다. 전철 안의 시선은 몽땅 아이바에게 몰렸다가, 또 금방 제자리로 돌아갔다.
너 진짜 미친놈 같아. 결국 푸하하 하고 사쿠라이의 웃음보가 터졌다. 눈물을 찔끔 흘리는 것에 아이바의 입꼬리가 씰룩씰룩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전철에서 내려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동안에는 분홍색 양산을 든 수상한 남자와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더 수상한 남자가 함께 걸어가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한껏 멋진 척을 하며 걸어가는 아이바를 보면서 사쿠라이는 제발 그만 하라며 배를 잡고 웃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덜 이상한 것 같지?"
"더 쪽팔리거든! 바보야!"
"그래도 이게 문구점에서 제일 간지나는 놈이었다고.."
"근데 교문에서 걸릴 것 같은데."
"라식 했다고 뻥치면 괜찮지 않을까?"
수업 다 끝나고 받으러 와! 역시나,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교칙에 선글라스 끼지 말라는 내용이 있어? 아이바는 니노미야에게 분통을 터뜨렸다.
니노미야는 질린 표정으로 아이바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게 바로 사랑에 미친 사람인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에게는 보여주기도 전에 걸려서 좋은 구경거리를 못 보게 만들다니 멍청하기 그지없었다.
쯧, 니노미야가 혀를 차는 동시에 아이바가 가방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이럴 줄 알고 말이지.
"가방에 하나 더 있지롱!"
"너 돈 없다고 하지 않았냐."
"문구점 아줌마가 이거 사는 사람 내가 처음이라고 그냥 만원에 두 개 주셨어"
"와.. 근데.. 좀.. 간지나는 것 같기도 하고."
"야 니가 뭘 좀 아는구나."
역시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건 마땅한 이유가 있었다. 니노미야는 선글라스를 돌려받으면 제게 3천원에 팔라며 제안했다.
니가 썼으니까 벌써 중고잖아. 현실적이고도 논리적인 이유였다. 아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힘차게 손을 맞잡았다. 마침 교실 뒷문 틈 사이로 오노가 얼굴을 불쑥 내미는 것이 보였다.
쟤 또 교과서 빌리러 왔네. 아침이라 영 기운이 없어 보이는 오노는 흐물흐물 니노미야의 자리로 다가왔다.
니노미야의 어깨에 두 팔을 추욱 걸치고 무게를 실으니 징그러우니까 떨어지라는 타박이 돌아왔다.
오노가 아이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4천원."
"낙찰."
"미친."
야 이런게 어딨어 너 나랑 벌써 악수도 했잖아!
열 내는 니노미야를 뒤로 한 채 아이바는 새로운 고객과 더욱 힘을 주어 악수를 나눴다.
이런 식이라면 마츠모토한테도 물어봐야 할까. 하지만 왠지 마츠모토는 이것보다 더 멋진 선글라스가 이미 있을 것 같았다.
아이바는 욕심 없는 인생을 살아가기로 했다. 선글라스를 낀 채 양 손으로 삼각형을 만들어 이마에 두고 고뇌하는 자세를 취했다.
누구나 가슴 속에 상처 하나쯤은 있는 거잖아요, 농락이었다. 개도 안 건드릴 똥폼이었다.
하지만 분하게도 니노미야는 그것이 멋들어지게 보였다.
한쪽 입 꼬리를 올리고 재수 없게 낄낄대는 오노의 복부를 팔꿈치로 강타했다.
크억, 소리를 내면서도 픽픽 웃음이 새는 소리가 들렸다. 패배의 쓴맛이 니노미야의 입안에 퍼졌다.
두고 봐 내가 더 싸고 멋있는 선글라스 구해서 니들 다 간지로 패줄 거야.
사실 아이바의 목적은 등굣길과 하굣길 따위의 작은 것이 아니었다. 옆에서 제가 어떤 이상한 꼴을 해서든 사쿠라이와 함께
여름을 즐기는 것이 목표였다. 여름하면 무엇이냐, 바다! 축제! 불꽃놀이! 그리고, 사랑의 시작!
사람 많은 것을 싫어하는 아이바가 좋아하는 것은 마지막을 제외하면 전혀 없지만
사쿠라이와 제 머리 위로 터지는 커다란 불꽃을 그리며 아이바는 들뜬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바 선글라스 가지고 나와. 언제 들어온 것인지 국어 선생님이 교탁을 탕탕 두드렸다. 수업시간이었다.
뒤돌아 니노미야를 째려보면 꼴좋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걸 친구라고. 아이바는 얌전히 선글라스를 내려놓았다.
시무룩한 표정이 먹혀들었는지 국어 선생은 1교시가 끝나고 돌려준다는 은혜를 베풀었다.
국어 선생은 집에 개를 키우는 것이 분명했다. 니노미야는 수업 내도록 궁시렁 궁시렁 말이 많았다. 곧 있으면 기말고사니까.
국어 선생은 뽀송뽀송한 아이바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트리며 선글라스를 건넸다.
아이바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헤헤 웃었다. 기말 고사가 다가 왔다. 즉, 여름 방학이 머지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아, 쇼짱 햇빛 들어온다. 나랑 자리 바꿔."
"진짜 여름 해는 대단하네, 고마워."
"쇼짱 몫까지 내가 다 타줄게!"
"그러고 보니까 좀 까매진 것 같기도 하다."
"그래? 어울려?"
"응, 엄청. 니노가 우리 둘이 같이 서 있으면 오셀로 같다더라."
"그거.. 어울리는 거 맞냐?"
"크흥..응..진짜로..크흑.."
거기 떠들 거면 나가서 떠들어. 입을 막고 끅끅거리다가 결국 도서관의 사서에게 혼나고 말았다.
아이바는 공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공부를 하고 있는 사쿠라이를 보는 것은 좋아했다.
집중하고 있으면 삐죽 튀어나오는 입술이나 관자놀이로 올라가는 검지까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쳐다보는 것을 들켰는지 사쿠라이가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아이바는 영어 문제집 안으로 쏙 빨개진 얼굴을 숨겼다.
킥킥, 하고 문제집 넘어 또 사쿠라이가 웃는 소리가 들렸다. 또 모르는 거 있구나?
아이바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던 문제들 중 중요 표시가 그려져 있는 녀석을 콕 집어 사쿠라이에게 보여주었다.
영어 지문을 중얼중얼. 낮으면서도 부드럽고 정확하게 귀에 꽂히는 목소리가 아이바의 심장을 간질간질 새하얀 깃털마냥 간지럽혔다.
저 말고 누가 또 듣고 있을 새라 휙휙 주위를 둘러보다 이쪽에는 관심도 없는 사서를 째려보면 사쿠라이가 집중하라며 머리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 마치 맞은 것 마냥 머리를 쓱쓱 문지르고 미안미안, 헤헤 웃었다.
아이바의 등 뒤로 노을이 노랗게 빨갛게 뒤섞여 주홍빛으로 바뀌다가 서서히 까맣게 내려앉았다.
사쿠라이는 그것이 아이바와 정말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생각해봤어? 방학에 놀러가는 거."
"아, 그게.. 아무래도 바다는 좀 힘들 것 같아."
"어...사람도 많고 치일 거고 시끄럽고 바다 별로지 별로야! 그거 오노 아이디어였어!"
"아니 나 때문에 제대로 못 놀 것 같아서. 나 바다도 못 들어가고. 그냥 너희끼리.."
"..쇼짱이 없으면 의미 없어."
"프흐흐 아이바씨는 저를 정말 좋아하시네요."
"사쿠라이 쇼씨-.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아악! 징그러 아이바 떨어져-!"
어둑어둑해진 하늘을 따라 양산이 없는 만큼 가까워진 두 사람이 투닥대며 걸었다. 사쿠라이의 집 근처 도서관에서 함께 공부를 하고
사쿠라이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는 것은 이미 익숙한 일이 되었다. 아들놈이 주말에 도서관을 간다고 아이바의 부모님은 천지개벽을 외치며 만나보지도 못한 사쿠라이를 신처럼 떠받들었다. 덩달아 두둑해진 용돈은 덤이었다. 덕분에 헤어지기 직전 슈퍼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또는 음료수 하나를 사쿠라이의 손에 들려줄 수 있었다. 개인 과외비야. 우리 엄마가 진짜 고마워하더라고.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면 사쿠라이는 마다하다가도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받아들이곤 했다.
저를 향해 힘차게 흔들어지는 손을 보며 아이바는 사쿠라이에게 문자 하나를 보냈다.
[여름축제는 괜찮아?]
사쿠라이는 붕붕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톡톡 화면을 두드렸다.
[응. 불꽃놀이 재밌겠다.]
답장을 확인한 아이바의 몸이 펄쩍 기쁨에 뛰었다. 얼마나 높게 뛰었는지 사쿠라이가 꺅꺅 웃는 것이 작게 아이바의 귀에 들렸다.
당장 오늘부터 축제를 즐길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아이바는 사쿠라이가 집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집으로 걸어가면서
오노와 니노미야, 마츠모토에게 연락을 넣었다. 아직 한 달은 더 남은 일이라며 니노미야가 타박했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흥미로워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저만큼은 아니더라도 다들 사쿠라이를 좋아하고, 그의 행복을 바랐으니까.
아이바는 다시 짐이 가득 쌓여있는 창고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몇 년 전에 아버지가 입었던 유카타가 있을 테였다.
축제의 드레스 코드는 역시나 여름의 정석 유카타였다.
"아-. 쇼짱 보고 싶어!"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면 마냥 기쁠 줄 알았는데 막상 방학이 시작되고 지나 보니 사쿠라이를 보는 시간이 학기 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적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는데, 아이바는 잔뜩 풀이 죽어 휴대폰만 만지작만지작 손에서 굴렸다. 너무 자주 놀러가는 것도 민폐겠지. 딱히 사쿠라이에게 초대받아 갔던 것도 아니니까.
방학을 맞이해 아이바는 처음으로 사쿠라이의 집에 놀러 갔다. 물론 오노 그리고 니노미야와 함께였다.
마츠모토는 일이 생겨 오지 못했지만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해서 대충 다 놀러온 것으로 치기로 했다.
현관문을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아이바의 입 꼬리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어간 사쿠라이의 방을 열심히 눈으로 훑었다. 급하게 정리를 한 것인지 약간 어수선한 방 안이 또 정겨워서 좋았다.
감히 침대에는 누워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방이 참 사쿠라이 답고 좋다며 중얼거리니
니노미야는 도대체 니가 싫은 게 뭐냐며 되물어왔다. 없지. 대답은 오노가 대신 했다.
부우웅,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츠모토였다.
영화 볼래? 조금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끌었더니 안 올 거야? 하고 마츠모토가 조금 힘을 주어 말했다.
마츠모토의 목소리 뒤로, 안 온대? 사쿠라이의 무척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아이바는 바로 침대에서 튀어 올라 무릎을 꿇었다.
당장 가겠습니다. 영화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제발 지금 어디인지 알려주세요. 처절한 아이바의 애원이 마츠모토의 심금을 울렸다.
아이바에게 하사 하듯이 장소를 알려주었다. 마츠모토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이바는 후다닥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진짜 선글라스 가지고 있었네."
"나 이런 선글라스가 잘 어울리는 사람 처음 봤어."
"아이바 너는 뭘 들고 온 거야."
"집에서 제일 큰 우산을.."
건장한 고등학생 세 명이서 화창하니 맑은 날 커다란 우산 하나에 들어가 있는 꼴은 꽤나 우스꽝스러웠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당당하게
시내 한복판을 걸었다. 특히 이상한 선글라스를 낀 훤칠한 남정네가 가장 신나보였다고 같이 거리를 거닐던 행인들은 회고했다.
애초 목적이었던 영화는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딱히 재미가 없기도 했고, 영화 화면보다 사쿠라이의 얼굴을 더 많이 쳐다보기도 했고,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화면 좀 어둡지 않았어? 하는 마츠모토의 얼굴에서 사쿠라이가 조용히 선글라스를 벗겨내니 아이바는 웃다가 거의 흐느끼기 시작해서 영화 내용? 정말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돌아갈 때 마츠모토는 선글라스를 셔츠 사이에 꽂아두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축제 때 선글라스도 쓰고 오라 할 셈이었는데 아무래도 틀린 것 같았다.
사쿠라이와 몰래 마주보며 킥킥 마츠모토를 비웃었다. 우산을 든 팔에 닿는 공기가 그렇게 뜨겁지만은 않았다.
이제 곧 여름의 끝자락이었다.
계절을 착각한 고추잠자리가 불쑥 길을 가다 하나 둘씩 튀어나왔다. 드디어 축제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다행히도 네 사람 모두 유카타가 집에 있다고 했다. 아이바의 방에는 이미 한 달 전부터 깨끗하게 빨아 곱게 다려 놓은 남색 유카타 한 벌이 제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직까지 사쿠라이에게 제대로 고백 한 번을 못한 아이바를 위해 소중한 친구들은 기회를 주기로 했다. 불꽃놀이 시간에 맞춰서 자리를 떠 주겠다고. 아이바는 사실 결국엔 고백을 하지 못한다 해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저 사쿠라이가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니까 이루어지지 않아도, 오히려 차이거나 하면 그게 큰일이 아닌가.
그래서 모두에게는 대충 알겠다고 고맙다는 말을 했지만 딱히 일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다. 태초의 목표를 배반하는 일이 되어버릴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의 이 관계가 아이바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 소중했다. 졸업식에서나마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아니라도 어른이 되어서 우스갯소리로 그때 너 좋아했었는데.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이바는 유카타와 함께 준비해둔 지우산을 팔락 팔락대며 펼쳤다 접었다를 반복했다.
사쿠라이가 좋아하는 벚꽃이 화려하게 그려진 고고한 녀석이었다.
사쿠라이는 어떤 유카타를 입고 나오려나. 뭘 입고 나오든 아이바는 순수하게 감탄할 테였지만 말이다.
"와."
"파리 들어가겠어."
"이대로 기절한 거 아니지?"
"마츠준 일단 쇼짱 좀 몸으로 가려봐."
"진짜 징글징글하다."
꼭 여름의 파란 하늘을 닮은 하늘색 유카타였다.
아슬아슬하게 해가 떠 있을 때 만난 탓에 들고 있는 분홍색의 양산과 세트처럼 잘 어울렸다.
아이바는 벌어진 입을 다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노는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검지를 아이바의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만족스러운 듯 소리를 내어 아하하 웃어대는 것에 조금 정신이 차려졌다. 오노의 손가락은 깨물리기 전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벌써 축제에 온 사람들로 주위는 북적 북적댔다. 그 많은 사람들 중 사쿠라이 일행에게 관심을 가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쿠라이는 그 어느 때보다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날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커다랗게 난 길 좌우로 줄을 선 가판대들에 불이 들어왔다. 사쿠라이의 양산이 탁, 시원한 소리를 내며 접혔다. 축제의 시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의 양손에는 먹거리들이 잔뜩 들렸다.
이러면 먹을 수가 없잖아! 하필 젓가락을 사용해야하는 음식을 고른 탓에 아이바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투덜거림을 들은 사쿠라이가 바보냐며 한바탕 웃고는 손에 들린 닭꼬치를 아이바의 입에 들이 밀었다.
아- 해봐. 아이바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살짝 탄 듯한 그 쓴 향마저 감탄이 날 정도로 맛있었다.
사쿠라이의 손목에 걸린 양산이 달랑달랑. 행복감에 살짝 어지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그 탓이려니 했다.
머지않아 사쿠라이의 손이 비어 아이바가 들고 있던 타코야끼를 잡아들었다. 타코야끼를 한 입 먹고 아이바는 보답으로 사쿠라이에게 야끼소바를 한 입 떠 먹여주었다.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마츠모토가 속삭였다. 우리 지금 빠지면 안돼? 니노미야는 말했다.
진정해 저기 저 중간까지만 참자 우리. 니노미야가 좋아하는 햄버그를 파는 가판대였다.
맛없기만 해봐. 언제 다녀온 것인지 금붕어를 잡아 달랑달랑 한 손에 들고 있는 오노가 부러웠다.
괜찮을까. 오노가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니노미야와 마츠모토는 대답대신 사쿠라이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걔네 완전히 낙오돼서 불꽃놀이 시간 못 맞출 것 같다고 우리끼리 일단 보래."
"아쉽다. 다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았는데."
아이바는 거짓말에는 영 서툰 편이었다. 그 짧은 변명에도 살짝 혀가 꼬였다. 다행히 사쿠라이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아이바는 사쿠라이를 이끌고 아버지에게 들어둔 불꽃놀이 명당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네 엄마를 거기서 낚아챘지.
아니 아빠 친구들끼리 가는 거라니까? 아버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아래로 야경이 보이는 앞이 탁 트인 언덕이었다.
뒤쪽이 나무로 가려져 있어 정말 아버지의 말마따나 로맨틱한 장소였다. 괜히 머쓱해져 사쿠라이를 돌아보니
왠지 쓸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애들을 다 불러와야하나. 아 참, 아이바는 제 손목에 걸린 지우산의 존재를 기억해냈다.
사쿠라이에게 선물이라며 건네니 환한 얼굴로 바로 펼쳐서 어깨 위에 걸쳐보였다. 다시 멍청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또 웃었다. 진짜 예쁘다. 이야기를 듣고는 뭐 그런 칭찬을 하냐면서 아이바의 팔을 툭 건드렸다. 고개를 살짝 내려 사쿠라이의 얼굴을 마주한 아이바가 사쿠라이의 유카타 소매를 붙잡았다. 고민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동시에 불꽃이 하늘 위로 터져 나왔다.
"사실 나 너 좋아해."
"응? 뭐라고?"
"너, 좋아한다고."
"미안한데 불꽃 때문에 잘 안 들려"
아이바는 폭죽 소리를 등에 업고 마음껏 제 마음을 소리쳤다. 전혀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도 같았다.
소리가 서서히 멎어가고 나 여름이 정말 좋아. 아이바가 말했다. 나도, 진짜 좋아해. 사쿠라이의 대답이었다.
까만 하늘을 바라보는 옆얼굴이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아이바는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얼굴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결심한 듯 사쿠라이가 아이바를 바라봤다.
"나 미국 가."
"뭐?"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폭죽이 터졌다. 그 어떤 불꽃보다 높은 곳에서, 크게 밤하늘에 꽃을 수놓았다.
아이바의 심장에도 사쿠라이가 미리 설치해둔 폭탄이 동시에 터졌다.
아이바는 그 날 이후로 몸져누웠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24시간을 내리 울어 탈수까지 왔다.
부모님은 대충 첫 사랑에 실패한 거라고 생각하고 아이바를 위로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셈이었다. 아버지의 일 때문이라고 했다.
방학이 끝나면 사쿠라이와도 안녕이라고 했다. 오노와 니노미야, 마츠모토는 축제 며칠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 했다.
아이바에게는 제가 직접 말하겠다며 입단속도 했단다. 아이바는 사쿠라이가 미웠다. 아니 거짓말이었다.
지금 당장 죽고 싶을 정도로 사쿠라이가 좋았다. 무려 일주일을 고장 난 로봇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할 생각도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려 확인한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사쿠라이에게 온 부재중 전화가 열통을 넘겼다.
문자함에 쌓인 문자는 전부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사이에 끼인 니노미야의 문자가 눈에 띄었다.
방학이 끝나기 하루 전, 바로 내일. 역에서 사쿠라이를 배웅할 예정이니 너 알아서 하라는 말이었다.
아이바는 신경질적으로 침대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가방을 집어던졌다. 열려있던 가방 속에서 방학 전 그대로의 내용물이
쏟아져 나왔다. 하얀 종이가 아이바의 앞으로 떨어졌다. 성적표였다. 그러고 보니 영어 80점 넘으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했었는데.
가지 말라고 하면 들어주려나. 피시식 힘없는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유치하고 못난 친구가 마지막으로 인사는 해야지.
아이바는 깜빡 잠이 들었다. 배터리가 아슬아슬한 휴대폰을 충전하는 것도 잊은 채.
아아아악! 아이바는 무작정 달렸다. 그렇게 싫어하는 끈적끈적한 땀에 옷이 젖어 들어가도 멈출 수가 없었다.
여전히 여름은 욕이 나올 정도로 싫었다. 이번 여름이 즐거웠던 것은 오직 아이바가 사쿠라이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사쿠라이를 만난 곳에서 사쿠라이와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 하다니 며칠 동안 쏟아 부어서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퐁퐁 새어 나오려 했다. 도착한 전철역사 안은 제 기분도 모르고 변함없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불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전철을 탄 사람은 꽤나 좋은 구경거리겠지.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시간이 아까웠다.
전철이 도착역에 멈추자마자 아이바는 튀어나왔다. 사쿠라이는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역무원이 위험하다며 아이바에게 다가갔다. 그 뒤로 빠르게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바짱? 왜 울고 있어."
"쇼짱.. 아직 안 간 거야? 나 안 늦었어?"
"응 나 이제 금방 도착했거든."
다가온 사쿠라이를 덥석 안았다. 아, 햇빛! 덥석 안은 채로 그늘까지 사쿠라이를 끌고 갔다.
다음 전철은 5분 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뒤쪽에 가만히 서 있던 세 사람이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이바는 숨을 깊이 들이 마신 후에 천천히 내뱉었다. 사쿠라이의 심장 박동에 제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쇼짱 나 너한테 말해야할게 잔뜩 있어. 축제는 어땠어? 타코야끼 맛있었어? 불꽃놀이는 재밌었어?
나랑 같이 있어서 싫거나 그러지는 않았어? 우리랑 같이 보낸 여름은 어땠어? 나는, 나는 진짜 재밌었어. ..쇼짱, 사실 나 여름 싫어해.
근데 네가 좋아한다니까 좋아하는 척 했어. 내리쬐는 햇빛도 싫고, 며칠을 질리지도 않고 내리는 장마는 더 싫어해,
여름의 바다는 사람이 많아서 싫어하고, 여름의 산은 벌레가 많아서 싫어, 여름의 불꽃놀이는 그냥 시끄러울 뿐이잖아.
방금 전에도 뛰어오면서 흘린 땀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 왔어. 쇼짱, 쇼짱 나. 사실 나는.
"네가 좋아. 좋아서 미칠 것 같아. 쇼짱, 나 쇼짱이 어디 안 갔으면 좋겠어."
"..고마워."
"미국 가서도 나 까먹지 마 쇼짱, 나는 절대로 너 안 까먹을 거니까 너 진짜 까먹으면 배신이야."
"응."
"..이렇게 말할 생각 없었는데, 진짜 좀 더 간지나게, 크흥, 하려고..흡..그랬는데.."
"아이바씨는 바보네 정말."
원래 마지막을 키스로 끝내면 대충 다 멋져 보이는 거야. 영화 같은 타이밍으로 양산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두 사람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한 엔딩 장면이 감독의 오케이를 받았다. 아이바가 멍청하게 서 있는 동안 전철이 도착했다.
기다렸던 인사를 위해 오노, 니노미야와 마츠모토가 다가왔다.
사쿠라이를 태운 전철이 빠르게도 떠나갔다. 어라? 아이바의 얼빠진 목소리가 전철역을 울렸다.
이미 멀어지는 전철은 얼어버린 아이바에게 답을 주지 못했다.
"쇼짱? 쇼짜앙?!“
닿을 곳 없는 외침은 불꽃놀이처럼 크고 화려하게 사랑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