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처구니 없는
아가페 대신 어리석은 마니아
야마다 타로 이야기
야마다 타로 X 미무라 타쿠야
어느 여름날, 미무라 가의 대저택 중에서도 가장 현대적이고 이질적인 공간.
주인과 집사. 두 사람 간의 모의는 매우 은밀하고도 철저하게 진행됐다.
"준비는 다 됐겠지, 이소가이?"
"걱정마십시오 도련님. 모든 사용인에게 몇 번이고 지시 내렸으니, 절대 실수는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도련님이 그토록 원하시던 일인걸요. 이 이소가이, 절대 도련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좋아."
미무라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제각기 흩뿌려져 있는 오키나와행 비행기 티켓 9장과 고급 호텔 스위트룸
이용권, 거기다 장장 2박 3일을 알차게 보낼 수 있을 여행 계획표까지. 모든 준비는 다 갖춰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 중대한 계획에 없어서는 안 될 `그 가족`뿐.
"조심하도록 해. 그 녀석, 바보같이 순진하지만 의외로 눈치가 빠르니까."
야생의 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 좋은 대학에서 톱을 달리는 녀석이 야생의 감으로 살아간다고 말하는 것도 뭣하지만. 그 덕에 매번 대학공부다 아르바이트다 여름 방학 때도 쉴 줄 모르고 뛰어다니니까. 이렇게 나서서 쉬게 해주지 않으면 언젠가 과로로 쓰러질지도 몰라. 매일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제 연인에게 휴가를 선물해주기 위해서. 미무라는 오직 그 일념 하나로 이번 일을 계획했다.
모든 검토를 끝으로 이소가이를 내보낸 그는 바로 연인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요즘 시대에 핸드폰은 어디다 두고 집전화로
통화를 하냐며 반박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모두 대학생임에도 그 흔한 핸드폰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상대의 탓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항상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기에, 미무라는 딱히 연인이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불편함을 느껴본 적도 없었다.
"여보세요?"
역시나.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언제나 해맑게 저를 반겨주는 연인.
미무라 타쿠야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해 마지않는 목소리였다.
"나야."
"아, 타쿠야 군?"
미무라 군에서 타쿠야 군으로. 한 달 전부터 바뀐 호칭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언제 들어도 참 만족스러웠다.
오랜 짝사랑 상대이자, 이제는 제 하나뿐인 연인이 된 타로. 미무라는 제 세상을 다 주어도 모자란 이에게 며칠째 공들인 선물을
바치기 위해 서서히 포석을 깔았다.
"타로, 혹시 내일 바빠?"
"응? 아니? 내일은...응, 아르바이트도 없고, 마트 타임 세일도 없고. 오랜만에 한가하네. 근데 갑자기 왜?
...혹시 타쿠야 군, 이거 데이트 신청이야?"
기대 섞인 목소리에 순간 웃음이 터졌다. 산책을 기대하는 강아지 같은 얼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안 봐도 훤했다.
우리 어제도 데이트하지 않았나? 아무튼, 몇 년간 마음 졸인 게 억울할 정도로 만날 때마다 데이트 신청을 종용하는 타로 때문에
오히려 휘말리는 건 자신이었다. 물론 타로와의 데이트라면 언제든 기쁘지만, 이번엔 둘이 아닌 온전히 그 혼자만이 행복해져야
할 때였다. 3순위에도 못 오르는 자신이 아닌, 타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혹시 내일 두 시쯤에 가족이랑 같이 ○○ 시장으로 나와줄 수 있어?"
"응? 나올 수 있긴 한데...나만 가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응, 다 같이."
어딘가 망설이는 타로를 눈치채지 못한 채, 미무라는 몇 번이고 가족과 함께 나올 것을 당부했다.
"혹시 알아? 예전에 여름 축제에서 수박이 당첨된 것처럼 좋은 일이 생길지."
타로가 얼마나 놀란 표정을 할지, 특유의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
"당첨! 당첨입니다! 1등상, 오키나와 2박 3일 가족 여행권에 당첨되셨습니다!"
"...에?"
미무라는 너무 과한 행운에 멍해져 버린 타로를 보며 가까스로 웃음을 삼켰다. 바보 같은 얼굴. 기뻐하는 동생들을 달래면서도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은 꽤나 흥미로운 소재였다.
누가 저 순진한 남자를 국내 굴지의 대학에 다니는 무리의 톱이라 여기겠는가.
오늘만 해도 그랬다. 제 말에 순순히 가족 전원을 데리고 나오고, 며칠 전 제가 놔둔 추첨권을 의심하지도 않고 그대로 가지고 나와, 동생들과 제 권유로 추첨을 돌린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결국 모든 계획은 야마다 타로라는 남자가 제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사람이었기에 비로소 실행될 수 있었다.
처음엔 요즘 시대에 저러다 큰일 나지 않을까 걱정도 많이 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국 타로니까
괜찮겠지 싶은 것이, 제가 봐도 아이러니했지만 그만큼 확실한 이유도 없던 탓이었다.
"타로, 축하해."
"타, 타쿠야 군!"
뒤늦게 기뻐하는 타로의 어깨를 토닥이며 축하를 전한 미무라는 동시에 저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이소가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는 뜻과 함께, 모든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표시였다.
"......타쿠야 군, 뭐 봐?"
"응?"
"아니, 뭘 보고 그렇게 예쁘게 웃나 싶어서. 내가 아니라."
아, 이런. 미무라는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했다. 본능이 강한 타로라면 아무리 먼 거리에 있는 이소가이라도 눈치챌지 모른다.
미무라는 다급히 눈앞의 점원을 향해 손짓했다. 여행과 관련된 말을 유도해 타로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속셈이었다.
“.......”
그렇게 작전을 들키지 않는 것에만 치중하고 있을 무렵. 미무라는 덕분에 제 연인의 까맣게 타버린 눈동자를 보지 못했다.
"얘, 타로!"
그것은 차마 질투라고도 할 수 없는, 과거 여동생에게 친한 남자친구가 생겼던 때와 감히 견줄 수 없을 만큼 어두운 감정이어서,
뒤에 있던 타로의 어머니인 아야코가 무심코 자제하라며 어깨를 두드릴 정도였다.
"축하드립니다, 손님. 개점 50년을 맞이한 저희 가게에서 특별히! 9분 한정으로 오키나와 2박 3일 무료 여행을 보내드립니다."
"9명?!"
"공짜로?!"
"예, 그럼요. 최상급 리조트부터 각종 음식, 관광까지. 여행에 드는 모든 경비는 전부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아무리 컸다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린아이. 몇 번이고 공짜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모습에 무엇이 저 아이들을 저렇게 만들었나 씁쓸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저렇게 폴짝폴짝 뛰며 한껏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역시 준비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타로도 이번만큼은 마음의 짐을 놓고 즐길 수 있겠지.
"그치만 형, 9명이면..."
"그러게. 1명 모자라."
...뭐?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너랑 너희 부모님, 지로, 사부로, 요시코, 이츠코, 무츠미, 나나미까지. 총 9명이잖아."
"...타쿠야 군, 우리 동생들 이름 다 외우고 있었구나..."
"뭐? 그야 당연하지!“
이 좁은 나라에서 그의 동생들 이름만큼이나 외우기 쉬운 것은 또 없을 것이다. 미무라는 단언했다.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고..."
미무라가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에 한창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타로를 포함한 그의 가족들은 뭐가 그리 좋은지 히죽이며 저들끼리 고개를 끄덕이기 바빴다.
"봐봐, 내 말이 맞지? 미무라 형아는 우리들 이름 다 알고 있다니까!"
"우와아...진짜네! 지로 형 말이 맞았어! 미무라 형아는 우리 형이랑 결혼할 사이고, 우리 이름도 다 알고있으니까...
그럼 미무라 형아는 우리 가족이야!"
물론 타로와 결혼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만. 그보다 이름을 외우는 것과 결혼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
나름 야마다 가에 대해 많이 알아왔다고 자부한 미무라는 당장에 제 생각을 정정했다.
아직도 저 가족은 미무라 같은 범인에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럼 이제 미무라 타쿠야 오빠가 아니라 야마다 타쿠야 오빠가 되는 거야?"
"이렇게 빨리 며느리를 데리고 오다니, 엄마 감격이야...!"
“아니, 잠깐만. 잠시만요.”
졸지에 야마다 가의 첫째 며느리가 된 미무라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제쳐두고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자신이 야마다 가에 입적한 것과는 별개로, 지금은 앞서 말한 `8명`에 주목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러고보니 타로, 너희 아버지는?"
미무라는 그제야 타로의 아버지가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전원 다 데리고 오라고 했는데.
그날그날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그의 아버지가 이렇게 재미있는 자리에 빠질 리 없었다.
설마. 자신을 향해 두 눈을 크게 뜨는 미무라를 보며 타로는 네 생각이 맞다는 듯,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을 찾아보겠다면서 또 해외로 떠나셨어. 나도 오늘 아침에 쪽지 보고 알았다니까."
그렇게 된 거였군. 미무라는 그제야 사건의 진상을 파악했다. 어쩐지 좀 덜 시끄럽다 했더니.
설마 새벽 사이에 훌쩍 일본을 떠났을 줄은 몰랐는데.
‘뭐...그래도 크게 상관 없겠지.’
완벽한 계획에서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그래봤자 인원수가 9명에서 8명이 줄어든 것뿐이다. 아니, 오히려 매번 골치 아픈 사건을
일으키는 상습범이-일단은 연인의 아버지였다-없어진 덕에 타로가 더 마음놓고 휴가를 즐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미무라는 알지 못했다. 매번 돈을 쓰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덕에 고작 비행기 자리 한 석 빈 것쯤이야,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반면. 평생 비행기 한 번 타보지 못하고, 제대로 된 휴가 한 번 가보지 못한 그들에게 몇 만엔짜리 비행기석과 한 사람분의
여행 비용이 날아간다는 것은 거의 타임세일을 기다리지도 않고 계란 한 판을 그냥 장바구니에 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만큼 아까웠다는 소리다.
“타쿠야 군!!!”
“어? 뭐, 뭐야 타로. 너희들도 왜 갑자기...”
갑자기 심각한 얼굴로 제 어깨를 감싸듯 부여잡은 타로하며, 포위하듯 제 몸을 둘러싼 그의 동생들까지.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의 그들은 보며, 미무라는 보기 드물게 직감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어딘가 불길하다는, 이들이 뭔가를 사건을 칠 것 같다는 불길함.
극히 이성적이고 계획적으로 행동하는 제가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역시 연인은 닮아간다는 말은 단순한 속설이 아니었다.
“타쿠야 군(형아)도 같이 가자!!!!!”
아, 역시나.
*
“와! 더워 형아!”
“와! 하늘이 맑아 형아!”
“와! 엄청 큰 바다가 있어 형아!”
“와! 수영복 입은 사람들이 많아 형아!”
“와! 맛있는 냄새가 나 형아!”
마지막은 오키나와랑 별로 상관없는 것 같은데.
미무라는 난생처음 보는 휴양지 풍경에 별 희한한 감상을 내뱉는 아이들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하긴 모든 게 처음일 테니 표현할 말도 마땅치 않을 터. 저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맛있는 음식이 많은 것도 사실이고.
“미무라 형아! 우리 이제 뭐해?”
“나 배고파!”
“그러게, 이제 슬슬 점심 때지.”
첫 비행으로 꽤나 지쳤을 테니, 일단 계획했던 식당으로 유도하는 게 좋겠지. 미무라는 아이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 않은 척 휴대폰으로 문자를 넣었다. 현지에 먼저 도착해 제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이소가이에게.
이제 갈테니 슬슬 준비를 해놓고 있으라는 명령이었다.
정확히 백 명. 이 철저한 남자는 성공적인 여행이라는 목표 앞에 타로네 가족이 들를 관광지나 호텔, 식당마다 각각
자기 가문의 사람을 배치해 두었다. 할아버지가 안다면 쓸데없는 낭비라며 역정을 냈겠지만, 분명 이 가족을 위해 쓴 것임을 알면
납득해주시리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제 조부에게 단 한 마디도 귀띔해주지 않은 그는 능숙한 발놀림으로 해변을 넘어
모두를 미리 준비해둔 리무진으로 안내했다.
“저, 저기, 도련님.”
“왜.”
“...정말 도련님에게 이런 일을 맡겨도 되는 건지...”
“걱정하지 말라니까.”
미무라는 제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가이드를 무시한 채 차 문을 열었다. 시종일관 처음 보는 풍경에 멍한 타로를 대신해
아이들 옷에 묻은 모래를 털고, 자그마한 몸을 리무진으로 옮기는 중에도 그의 비상한 머리는 멈출 줄을 몰랐다.
실력이 좋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 이 가이드는 매번 특이한 일만 일으키는 이 가족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게 뻔했으니, 미무라는 차라리 제가 이들의 가이드 역을 자처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이드인 자신은 그냥 이들을 무사히 목적지에 데려다 놓은 뒤, 제 가족들과 함께 행복해하는 타로를 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우와......”
아이들은 이렇게 넓은 차는 처음 타본다며 방방 뛰었다. 그도 그랬다. 과거 타임 세일에 늦지 않으려 제 차를 몇 번 얻어탄 적은
있었지만 그 차는 이렇게 크고 넓지 않았으니. 기껏 갈 거면 리무진을 타고 가라는 주위 어른들의 말을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거절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걸 그랬다. 그랬다면 좀 더 빨리 저 웃음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미무라는 짧게 후회했다.
고작 타인의 가족. 연인의 가족이지만 결국 피로 엮이지 않은 사이. 당연한 사실이었지만 많은 것이 달랐다. 무뚝뚝한 할아버지.
제 실속만 챙기기 급급한 친척들. 그리고 돌아가신 부모님. 가족이라는 단어만 보면 숨이 막히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게 됐다.
사소하지만 짜증나는 버릇이었다. 억만금이 필요하대도 돈을 주고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한 것들.
그런 것들을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없애주었던 건 다름 아닌 타로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많이 달라지셨군요, 도련님.
기쁘게 웃는 이소가이에게 쓸데없는 말이라며 핀잔을 주지 못했던 건 왜일까. 하지만 마무리라고 해서 처음부터
그 가족에게 애정을 준 것은 아니었다. 최선을 다한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타로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그랬다.
오히려 질투를 느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었다. 연인의 가족에게 질투라니. 볼썽사납게도 그러했다.
“타, 타쿠야 군. 여기 너무 비싼 거 아니야?”
“괜찮아. 아까 말했잖아. 여행에 드는 모든 경비는 그쪽에서 내준다고.”
“아, 아무리 그래도 타쿠야 군. 여기 음식 너무 비싸보이는데...”
“괜찮다니까.”
너라면 다 괜찮아. 너한테 쓰는 돈인데 뭐가 아깝겠어. 정말 괜찮아, 타로. 고급 호텔 스위트룸과 한 끼에 30만엔이 족히 넘어갈
식사 등등. 이것도 저것도 전부 비싸 보이는 광경을 보며 손을 벌벌 떠는 타로에게 미무라는 차마 전하지 못할 말을
괜찮다는 말로 넘겼다. 일종의 버릇이었다.
제 속을 내보이지 않는 것은 유서 깊은 미무라 가의 전통. 미무라는 부모님을 잃었을 때도, 이소가이가 휴가로 가족들과 여행을
떠났을 때도, 할아버지에게 싸늘한 눈초리를 받았을 때도 침묵으로 모든 고통을 참아왔다. 속을 삭이고, 마음을 죽이고, 눈을 감고
서러움을 참는 행위야말로 미덕이라 여기는 전통 아래 적자인 미무라가 반항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단지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다는 말을 내뱉기 싫어, 마음마저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억지로 아랫입술을 깨물고 버텨, 괜찮다는 말만큼은 내뱉지 않았을 뿐. 연약한 아이는 그런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든, 어른이 되든.
미무라 타쿠야는 여전히 연약했다.
그러던 와중 미무라는 별 이해할 수 없는, 바보 같을 정도로 노력하는 한 남자를 만났다. 야마다 타로. 우연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재밌어 보였고, 무료한 자신의 일상을 달래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옆을 따라다니며 모든 것을 관망했다.
가끔은 그 재미있는 것이 사라지지 않게 간섭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시간이 지나, 어느새 마음을 내주어 버렸다.
미무라 타쿠야는 소중한 이에게 욕심 없이, 헌신적으로 사랑을 베푸는 야마다 타로를 보며 사랑을 알았다. 그게 사랑임을 알았다.
그리고 제 사랑이 향한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알려준 스승, 야마다 타로였다. 그는 감사하게도 치기 어린 고백에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미무라는 그때 비로소 너무 기뻐 울 것 같다는 감각이 뭔지 알았다. 너무 기뻐서 울 수도 있구나.
동화책에서나 보던 서술이 환상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기뻤다. 무채색이던 세상이 단번에 화사해진 것만 같았다.
드디어 제 앞에 놓인 꽃의 색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미무라는 어두웠다. 야마다 타로가 존재하는 세상. 저를 둘러싼 모든 세상이 아름다운데, 그 홀로만 회색이었다.
빌어먹을 전통. 빌어먹을 두려움. 연인을 배려한답시고 내뱉은 괜찮아, 는 미무라를 여전히 흑백 영화에 머물게 했다.
하지만 미무라는 결코 야마다 타로에게 제 욕망을 드러내지 못했다. 사랑은 그런 것이었으니까. 대가 없는 나눔. 배려. 마치 타로가 제 가족에게 대하는 것처럼. 자신은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배웠으니까. 타로의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도 들 수 있을지
모르는 자신이, 그런 헛된 꿈을 꿔선 안되는 거니까.
미무라의 사랑은 질투 따윈 용서되지 않는 억지 아가페였다.
*
“저, 저 혹시 혼자 오셨나요? 그러시다면 저희랑 같이...”
헌팅. 타쿠야 군한테 헌팅. 내가 있는데, 헌팅. 동생들과 같이 물놀이를 즐기고 있던 타로는 어느새 여자들한테 둘러싸인 미무라를
보며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순간 감히, 라는 단어와 함께 속에서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들끓어 올랐다.
그렇지만 금방 평온해졌다. 결코 기분이 좋은 건 아니지만, 타쿠야 군이라면 분명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젓곤
다시 이쪽으로 시선을 돌릴 거니까. 나를 보며 웃어줄 거니까.
“...예, 뭐.”
하지만 마치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냐고 비웃는 것처럼, 미무라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려는 듯, 그들과 함께 가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상할 정도로 하얀 발등이
모래바닥에 닿아 중력을 거스르고 일어난 순간. 야마다 타로는 인생 처음으로 정신줄이 꺼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것은 너무 어둡고, 무섭고, 또 말도 안 되게 더러운 생각이라서. 만약 지금 당장 제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자가 있었다면
바로 입을 손으로 부여잡고 구역질을 해댈 것이다. 타로는 은연중에 확신했다. 그만큼 허락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타쿠야 군이, 좋다고 했어. 내가 있는데. 내가 연인인데.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리고 있어. 그 다정한 미소를, 내가 아닌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손을 뻗어주려고? 그 눈동자에 다른 사람을 담으려고? 왜? 타쿠야 군, 왜?
그 자리는 나만 있어야 하는 자리잖아. 너는 나만 사랑해야 하잖아!
“타쿠야 군!!!”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꾹, 강하게 손목을 잡아챈 탓에 미무라가 신음을 뱉으며 순간 미간을 찌푸렸지만 타로는
신경쓰지 않았다. 신경쓰지 못했다. 평소 조금이라도 아픈 티를 내면 세상 모든 호들갑을 다 빌려온 것처럼 구는 주제에.
지금만큼은 미무라가 밉고 또 미워서, 그런 것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가는 거야 타쿠야 군. 타쿠야 군.”
속에서 하고 싶은 말이 빙빙 도는데, 차마 나오는 말은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뿐이다. 왜 저 사람들의 제안을 받아들였어? 왜 저 사람들과 같이 가려고 했어? 수없이 쌓인 설움과 증오가 터져 나왔다. 한껏 당황해하는 마무라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을
눈짓 한 번으로 쫓아낸 타로는 이미 빨개진 손목에 더 세게 힘을 주었다. 혹, 그동안 모아놓은 돈으로 타쿠야 군의 손목 발목을
다 묶어놓을 수 있는 구속구를 살 수 있을까 가늠하면서.
“타로, 잠깐만, 아파, 너무 아파...”
“타쿠야 군. 타쿠야 군.”
“미안해, 잘못했어 타로. 그냥, 나는, 나는, 저 사람들이...”
그만큼 말 못할 얘기인 건지 자꾸만 뒷말이 먹혀들어간다. 타쿠야 군. 다시 한 번 재촉 그의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타로는 손목을 뿌리치고 그의 얇은 어깨를 부여잡으며 속삭였다.
“내가 있으면서, 엄연히 연인인 내가 여기 있는데. 왜 가려고 했어? 저거 헌팅이잖아. 자기들이랑 같이 놀자고,
나랑 같이 있는 것처럼 같이 웃고 같이 떠들면서 타쿠야 군을 눈에 담는 거잖아. 내 사람인데, 내 타쿠야 군인데.”
“...타로.”
“나한테 무슨 서운한 거라도 있어? 내가 타쿠야 군을 외롭게 했어? 그래? 그래서 그런 거야?”
계속 침묵을 지키는 모습이 답답했지만 재촉하거나 윽박을 지르진 않았다. 그러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어질까봐.
지금도 눈가가 빨개진 채로 숨을 들이쉬고만 있는 타쿠야 군을 결국 울릴 것 같아서. 타로는 제 손을 밀어내며 시선을 피하는
미무라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질린 거야? 입에 맴돌고 있는 말을 내뱉지 못한 채로.
“타로, 그만, 제발, 잘못했어. 그러니까 잠시만, 잠시만 떨어져 줘. 내가, 숨을 쉴 수 있게...”
“...타쿠야 군.”
타로는 최대한 미무라를 이해하려 애썼다. 혹시 다른 까닭이 있었을까. 타쿠야 군은 똑똑하니까, 나름의 생각이 있었을까.
하지만 모든 연구가 으레 그렇듯, 대부분의 일은 머리가 지시한 대로 따라주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그것이 산들바람에도 갈대 휘날리듯 흔들리는 인간의 감정이라면 더더욱.
“...아냐, 됐어.”
타로는 천천히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자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눈에 담았다는 서운함에 차마 사죄의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식하게 그의 손목을 잡았던 것도. 위협하듯 어깨를 붙잡았던 것도, 그가 겁먹은 표정을 짓게 만들었던 것도.
이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죄책감 따윈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감히. 그래 감히.
그때, 분위기를 눈치챈 건지 하나 둘 불안한 표정으로 제 바짓단을 잡는 동생들이 보였다. 형, 괜찮아? 꽤 컸다고 달라붙지도 않고,
제법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지로의 말에 타로는 태연하게 웃었다. 사실 가족 앞에서 올라가지도 않는 입꼬리를 올리는 경험은
난생처음인지라 자꾸 얼굴 여기저기가 아팠다. 하지만 무시했다. 저 멀리 홀로 서있는 미무라를 피해 고개를 돌려버리고,
가자는 말도 하지 않은 채 앞서 나갔다. 마치 그를 무시하듯이.
“...나도 지금은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네.”
“타, 로.”
“우리 먼저 가볼게.”
미무라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여기 있지도 못할 처지인 주제에. 타로는 매몰차게 말을 끊고는 끝내 미무라를 향해 등을 보였다.
그렇기에 그는 마지막까지 보지 못했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애처롭게 손을 뻗다 결국 주먹을 꽉 쥐어버리는 미무라를.
그를 보며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양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자신의 동생, 요시코를.
*
온통 푸른빛으로 둘러싸여 얼굴조차 구별하기 힘든 곳인데. 너는 이럴 때마저 빛이 나는구나.
꼭, 땅에 있는 사람은 결코 닿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처럼.
가오리. 돌고래. 상어. 열대어. 수족관에서 잘 먹고 잘 자란 생선을 보며 맛있겠다며 입맛을 다시던 아이들이 다시 또 뭘 발견했는지 눈을 반짝였다. 아, 팝콘인가. 스낵코너로 달려나가는 아이들을 눈으로 좇던 미무라는 이소가이에게 짧은 문자를 남겼다.
이제 슬슬 도착해. 점원들한테 잘 전하고. 휴대폰에서 눈을 뗀 미무라는 이럴 시간이 아깝다는 듯 서둘러 시선을 옮겼다.
그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은 단 하나, 야마다 타로를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저에겐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은 채, 야속하게 등을 내보이는 그를 보며 미무라는 그럴 만하다는 듯이 자조했다.
하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미무라는 속으로 제 처지를 비웃었다.
타로를 제외한 누군가에게 마음을 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무라 타쿠야로서 존재한다면, 그럴 수는 없는 얘기였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그들의 제안을 수락한 것이 아니다. 처음엔 평소처럼 당연하다는 듯이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 사람들이 타로에게 다가간다면, 타로가 만에 하나 내게 질린 마음이 들어 이 사람들을 따라간다면
어쩌나. 그렇다면 나는 타로에게 가지 말라며, 나를 두고 어딜 가는 거냐며 그를 막을 수 있을까. 내가, 이런 내가.
미무라는 타로를, 타로의 가족들을, 친구들을, 그를 둘러싼 모든 이들을 떠올렸다. 지금의 나는 그에게 몇 순위일까.
애정의 순위를 매기는 것 자체가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미무라는 좀처럼 타산적인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불안해서. 그렇게라도 애정에 확신을 받고 싶으니까. 방심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버림받기 싫으니까.
‘그런 짓을 해버렸으니, 이젠 더 이상 과거의 순위로 돌아갈 수 없겠지. 그럼 7순위? 8순위? 모르겠다.
그저 비참하고 한심하다는 것밖에는.’
미무라는 늘 그랬듯 혼자만의 주문을 외웠다. 서러움을 죽이자. 눈물을 죽이자. 그럼...괜찮을거야. 이러면 늘 가슴이 차게 가라앉았다. 혼란스러운 감정도 곧 제자리를 찾았다. 빨개졌던 눈가도 점점 색을 찾았다. 제자리를 찾은 건지, 너무 차가워 굳게 얼어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미무라는 그 사실조차 괜찮다는 말로 자물쇠를 걸어버렸다.
“미무라 오빠!”
그러던 와중, 무언가 밑에서 바짓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내려 살펴보니 그곳에는
타로의 동생인 요시코가 서 있었다. 기분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불안한 얼굴로.
“...요시코?”
미무라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무릎을 굽히곤 왜 그래, 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미무라 오빠, 괜찮아?”
남에게서 듣는 괜찮아가 이렇게 충격적인 말이었던가. 나직하게, 제 눈치를 살피며 걱정스레 묻는 이 말이 이렇게 놀랍던 일이던가. 미무라는 그대로 입을 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여태껏 외면하던 체념을 이렇게 돌려받는 기분이었다.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더 이상 감정을 속이기 싫다는 것처럼.
더는 말하기 싫다고 항의하는 것처럼.
미무라는 순간 여태껏 괜찮다는 말로 꾹 삼켜 넘겼던 기억을 되살렸다.
-와, 타쿠야 군! 이것 좀 봐!
발랜타인데이였을까. 두 손 가득 초콜릿을 받아온 타로를 보며 차마 서운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것.
-아, 타쿠야 군. 무슨 일 있어? 나 지금 마트 세일 때문에...
할아버지에게 늘 그랬던 질타를 받았던 날. 왜 그런지 더 위로가 필요했던 날에, 가봐야 한다며 자리를 나서는 타로를
결국 잡지 못했던 것. 좀 더 있으면 안 되냐고, 가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던 것.
-아, 맞다. 저...미안해, 타쿠야 군. 나 오늘 사부로 숙제 때문에...
기적적으로 연인이 된 뒤 처음으로 맺는 관계가 끝나고. 그의 손을 잡을까 망설이던 차에 천천히 일어나는
타로를 향해 전하지 못했던 것. 더 있어줘, 조금만 더, 네 온기를 느끼고 싶어.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말했던 그때.
참는 것밖에 잘 할 줄 몰랐던 내가, 여태껏 꾹꾹 눌러담아 아직도 흘려보내지 못했던 것.
정말, 많은 것이...
“미안, 정말 미안해, 요시코.”
애써 무시해왔던 기억은 생각보다 적나라하고, 잔인했다
마치 예상치 못한 시체에 구역질이 나 도망쳐버린 장의사처럼.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처럼.
“미무라 오빠!”
미무라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서있을 수 없었다. 나오면 안 될 것이라도 나오려는 건지. 입을 부여잡고 발을 틀어,
그대로 수족관을 나갔다. 요시코를 타로에게 데려다줘야 하는데, 이 상태로 그의 얼굴을 봤다간 그대로 서운함을 쏟아낼 것 같았다. 감정을 토해낼 것 같았다. 내가 뭐라고, 감히. 꼭 그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도망쳤다.
“도련님!”
입구에서 당황한 얼굴로 자신을 쫓아오려는 이소가이에게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은 미무라는 달리고 또 달렸다.
마치 미련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작게 구역질까지 해가며 턱까지 차올랐던 숨을 내뱉던 그는 문득 발목에 차디찬 물이 닿고 나서야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노을이 진, 시리도록 아름다운 바다. 달리다 보니 이대로 바다까지 왔구나, 생각하던 미무라는 다시금 고개를 내렸다.
바닷바람이 너무 강해, 더는 눈을 뜰 수 없었기에.
바람 한 자락 없이 잔잔한 해변가에서 미무라는 한 방울, 두 방울 자신을 내려놓았다. 내가 흘린 이 눈물이 저 맑은 바다에겐
독이 될까. 타로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일까. 모든 사물에 야마다 타로를 비추고 마는 건
미무라 타쿠야로서 사는 인간의 고질병이었다.
*
미무라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끝끝내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던 것은 단 하나. 한낱 이기심 때문이었다.
“미무라 오빠!”
어딘가 쫓기듯이 도망치는 미무라를 보고 있는 지금도 그랬다. 요시코와 말을 섞다,
갑자기 수족관을 나서는 뒷모습을 똑똑히 보았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타쿠야 군.”
뒤늦은 소리는 상대에게 닿지 않는다. 당연한 사실이었다.
‘내가 지금 쫓아가 봤자 타쿠야 군에게 상처만 더 주겠지.’
또다시 배려의 탈을 쓴 이기심이 뚝뚝 떨어져 큰 원을 그렸다. 세상 사람에게는 수없이 많은 원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신과 가족,
연인, 친구라는 네 개의 원을. 혹 어떤 사람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원을 가졌다. 하지만 야마다 타로의 원은
오직 자신과 가족이라 적혀져 있는 원 하나. 그것뿐이었다.
타로는 과거도 지금도 줄곧 그 원 안에 앉아 있었다. 자신과 제 가족에게 득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될 것 같진 않았던 남자. 미무라의 고백을 받아들일 때도 그랬다. 그가 얼마나 겁이 많은지 알면서, 한평생 스스로 다가올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타로는 이 원안의 세계가 자신의 전부라는 양, 선 밖에서 어쩔 줄 모르는 미무라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연인인데도, 연인인 주제에. 나는 절대 나갈 생각이 없으니, 네가 알아서 들어오라는 것처럼. 타쿠야 군은 항상 날 이해해주겠지. 왜냐면, 날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잘도 뻔뻔하게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아놓고선, 그는 여전히 맑게 웃었다. 미무라 타쿠야가 넘어가지 않곤 못 배기는 그런 미소.
야마다 타로는 맑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지만 결코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호의가, 짝사랑이, 아니면 더 깊은 감정이 담겼을지 모를
여학생들의 도시락이나 초콜릿을 그저 식량으로밖에 취급하지 못하는 인간이었으니. 하물며 연인의 호의조차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로 여겼으니. 세상 사람들은 남의 마음을 함부로 짓밟아버리는 사람을 보며 쓰레기라는 단어를 썼다.
그리고 그 쓰레기는 결국 지켜보다 못한 제 가족에게까지 그 행동을 규탄받기 마련이었다.
“오빠는 바보야!!!”
여태껏 제게 손찌검 하나 한 적 없던 요시코가 있는 힘껏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을 때, 타로는 그제야 무언가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요시코는 그동안 한심하기 없는 행동을 똑똑히 다 보았다는 듯, 타로를 향해
화난 표정으로 한껏 소리를 질렀다.
“미무라 오빠는 타로 오빠한테 전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단 말이야! 타로 오빠를 볼 때마다 늘 울 것 같은 얼굴로,
꼭 눈치채 달라는 표정을 짓는단 말이야...! 타로 오빠가 우리랑 같이 미무라 오빠한테서 멀어질 때마다,
꼭 가지말라는 듯이 손을 뻗는데, 만날 때마다 자기를 봐달라고 소리치는데, 어떻게 오빠는 그걸 몰라!!!!”
타로는 요시코의 눈물 젖은 말을 듣는 중간중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 가... 타쿠야 군은 돌아서는 나를 보며 항상 괜찮다는 듯이 웃었어. 자기를 봐달라던지, 가지 말라던지, 하물며 울 것 같은 표정은, 절대로...늘, 언제나 괜찮다고만...
-타로, 혹시 지금 내가 너한테 가지 말라고 하면. 그러면, 어떡할 것 같아? 막, 나한테 질리고 그럴 것 같아?
아무 일도 아니던, 극히 평범한 날. 타쿠야 군은 학교 선배와의 약속을 앞두고 헤어지는 나를 보며 그렇게 말했었다.
뒤를 돌고 있어 차마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평소 타쿠야 군의 목소리와 조금 달랐다는 것만은 희미하게 기억이 난다.
낮고, 흐리고, 어둡고, 그리고...물기가 어려있는 그런 목소리.
그런 목소리를, 누가 들어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목소리를 들은 나는. 대체 타쿠야 군에게 뭐라고 말했었지?
-음...글쎄. 근데 어차피 타쿠야 군은 괜찮다고 말해줄 거잖아!
...아.
그래, 그랬었다. 타쿠야 군의 생각이라곤 전혀 고려하지도, 고려할 생각도 없었던, 그런 대답. 그저 자신밖에 생각하지 않던,
연인으로서 최악의 선택을 내린 한 남자의 대답. 그 한심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타쿠야 군은, 끔찍하게 나를 아끼는 타쿠야 군은,
그때도...
-...그렇지. 맞아. 장난이었어.
늘 그렇게, 한결같이...
-난 괜찮으니까, 다녀와 타로.
“정말 저러다, 오빠한테 지친 미무라 오빠가 영영 우리 곁을 떠나면 어떡해!!!”
야마다 타로는 맹세컨대 가족을 제외한 누군가를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본 적이 없다.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이, 제 원에 들어올 리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제가 믿어왔던 과거의 생각은 모두 궤변에 지나지 않았다. 타쿠야 군이 내 곁을 떠날 수도 있다.
내가 너무 무신경했으니까, 타쿠야 군을 제대로 바라봐주지 않았으니까, 내가 이기적이었으니까.
타쿠야 군이 없어진다면, 나는 과연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타로는 질문에 확신을 담았다. 아니,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을 보는 그 달콤한 눈동자가, 너그러운 미소가,
자신을 쓰다듬어주는 그 소중한 온기가 없다면. 자신은 살 수 없었다.
사과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그러니 제발, 버리지 말아 달라고. 그 사실만이 타로를 움직이게 했다.
야마다 타로는 그 순간 자신이 만들었던, 견고하디 견고한 성을 우그러 밟았다. 이기로 가득찬 남자가 죄를 품었을 때,
그가 향할 곳이라고는 단 한 장소뿐이었다.
인간이면서 신의 사랑-아가페-을 품고야만 남자. 미무라 타쿠야의 곁으로.
타로는 저 멀리 자기혐오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미무라를 향해 뛰고, 또 뛰었다.
그 순간 야마다 타로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오만하게도 전부 사랑이었다.
지금이 오후인지, 밤인지. 아니면 그사이인지. 타로는 서서히 불그스름하게 변해가는 미무라의 뒷모습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무엇을 보든, 지금 이 순간 타로의 머릿속에는 온통 후회스러운 일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푸른 하늘이 달궈지는 내내
타쿠야 군과 한 번이라도 손을 잡아본 적이 있던가. 자기를 두고 어떻게 저 사람들을 따라갈 수 있냐고 윽박지르기 전에,
타쿠야 군을 외롭지 않게 만들어주긴 했나. 그 어느 것도 맞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사실 투성이였다.
“...타쿠야 군.”
미무라는 타로의 기척을 눈치챘음에도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치 말을 섞을 가치도 없다는 것처럼. 그렇겠지.
타로는 그것이 당연하다는 양 말없이 제 연인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저무는 태양. 노을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
모래에 파묻힌 조개껍데기. 온통 아름다운 것이 타로의 눈길을 끌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하지만 타로는 비단 그런 것들뿐만이
아니라, 여태껏 살면서 미무라만큼 아름다운 것을 찾지 못했다.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면 감싸고 소중히 하는 게 당연한 행위인 것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을 품에 가둔 주제에 자신은 무지하고 또 무지했다.
당연히 향해야 할 관심조차 바스러져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였다. 타로는 문득,
이렇게 한심한 인간이 감히 그의 곁에 머물러도 되나 고민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그럴 순 없었다. 타쿠야 군의 곁을 스스로 떠난다? 미무라 타쿠야라는 사람을 알고, 그의 사랑스러움을 알았을 때부터 이미 무리인 이야기였다. 그런 주제에 그런 짓을, 용서받지 못할 짓을, 호의를 등에 업고 분수에 맞지 않는
죄를 저질렀으니. 타로는 그와 사귈 때부터 제 옆에 놓여있던 목줄을 찾아 굳게 걸어채웠다. 욕을 해도 좋으니, 비난하고 걷어차도 좋으니 제발 곁에만 있게 해준다면. 타로는 바라고 또 바랐다. 무의식중에 믿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타쿠야 군이라면 설령
쓴 말을 던지며 미간을 찌푸릴지언정, 결코 자신을 내치지 않으리라고.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무슨 근거로.
“...타로.”
덤덤히 제 이름을 부른 미무라가 고개를 돌렸을 때. 타로는 그제야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타로. 우리, 그만 헤어질까?”
몰려오는 구름 탓에 서서히 어둠으로 사라지는 타쿠야 군은 정말 다 포기한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타로는 그만 저런 얼굴을 짓게 만든 자신의 목을 꽉 졸라 죽이고만 싶었다.
*
노을진 바닷가 아래, 미무라는 모래를 머금다 다시 떠나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문득 타로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타로가 모래를 머금다 다시 홀연히 떠나는 바다라면, 나는 저 모래와 닮았을까. 미련하게 제 욕망을 따라 바다와 함께하지도 못하고, 다가올 바다를 기다리며 그저 하염없이 서있을 뿐인.
‘타로. 타로. ...타로.’
가만히 타로의 이름을 되뇌던 미무라는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겠구나.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그리 마음을 잡고 나니 마치 예전부터 계획해 놓은 것마냥 증거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랑을 재고, 사랑을 구걸하는
자신은 결국 타로에게 어울리는 인연이 아니겠거니, 아무리 참고 노력해도 그처럼 무조건적인 사랑은 베풀 수 없겠거니.
미무라는 사랑 앞에 절망했다. 헌신적이고, 배려 넘치고, 나눈 만큼 받지 못해도 괜찮다 넘어갈 수 있는 사랑.
미무라는 그런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라 배웠으니까.
“...타로.”
타인에게 향하는 시선마저 언제나 독점하길 원했던 미무라는 또다시 하고 싶었던 말을 굳게 삼켰다.
타로. 사랑해. 정말, 정말 사랑해.
“타로. 우리, 그만 헤어질까?”
차마 헤어지자고 딱 잘라 말하지 못했던 것은 나의 구질구질함. 선택을 너에게 떠넘긴 것은 나의 이기심.
미무라는 곧 돌아올 답을 예상했다. 분명 왜 그러냐며 당황해하겠지. 무슨 일 있었냐며, 자신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냐며
늘 그랬듯 자신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다. 그는 다정하고 다정해서. 모진 말로 내쫓지 않는 한 그러지 말라며
제게 계속 달라붙 것이 뻔하니까. 그는 애정을 품지 않은 이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다정했으니. 한때 관심을 가졌고,
이미 정이 다 떨어져 버린 자신에게도 과분한 손길을 내밀어 줄 터.
하지만 그런 그라도. 네가 그런 사람이기에. 너는 사람 말을 너무 곧이곧대로 잘 믿으니까. 이제 질렸다는 둥, 보기 싫다는 둥.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꺼낸다면 그게 거짓말인지 알지도, 알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나를 떠나겠지.
타쿠야 군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지금도 눈에 선한 말을 뱉으면서, 그렇게, 눈앞에 있는 너는...
“싫어.”
...뭐?
“...타로? 너 지금, 뭐라고...”
“싫어 타쿠야 군. 싫어.”
미무라는 제 앞에 서있는 남자가 정말 자신이 아는 야마다 타로가 맞나 고민했다. 헤어지자는 말에 단번에 무너지는 표정과,
줄곧 싫다며 필사적으로 저를 붙잡으려는 모습까지. 언제나 웃는 낯이었던 타로가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타쿠야 군, 타쿠야 군....”
버림받기 직전의 강아지마냥 애절한 얼굴로 미무라를 껴안은 타로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내렸다. 타로! 다급하게 그의 몸을
안아 들어봤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미무라는 타로와 함께 아래로 무너지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다. 헤어지자는 제 말에
설 힘조차 없을 정도로 충격을 받은 걸까. 몸이 충격받은 정신을 못 따라갔던 걸까.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걸 알면서도
미무라는 다시금 믿음을 내주고 말았다. 누가 뭐래도 타로였으니까.
첨벙. 차가운 바닷물이 등과 다리를 잔뜩 적셨다. 찬물에 갑자기 빠지는 것만큼 불쾌한 것도 없었건만,
미무라는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 가지 말라는 듯, 떠나지 말라는 듯. 타로가 저를 떨리는 손으로 안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감각에 눈을 돌릴 수 있겠는가.
“잘못했어, 내가, 내가, 정말,”
“타로? 왜 그래, 좀 진정해 봐. 숨 제대로 쉬고 있는 거 맞아? 타로!”
마치 과호흡 증세라도 일어난 것마냥 헐떡이는 모습에 미무라가 다급히 타로를 살폈다. 타로는 한참을 덜컥거리면서도 그
어눌한 발음으로 수없이 미무라의 이름을 불렀다. 미무라가 자신의 옆에 있다는 사실에 몇 번이고 확신을 받으려 하는 모양새였다.
“타쿠야 군, 하아, 흡, 타, 쿠야...”
“그래 타로. 나 여기 있어. 타로. 숨 천천히 내쉬고. 응, 나 어디 안가니까...”
미무라는 서툰 손짓으로 타로의 등을 쓸고, 불안에 떠는 손을 마주 잡았다. 점점 어두워져 가는 하늘 탓일까.
아니면 그가 빛을 등진 탓일까. 타로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하나도 보이지 않았지만,
미무라는 분명 그가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물기가 잔뜩 어려있는 저 목소리는 분명 자신이 잘못들은 게 아닐 거라고. 미무라는 부족한 믿음으로 확신했다.
“타쿠야 군,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정말 염치없지만, 그렇지만...제발 날 버리지 말아줘.
계속 미워해도 좋으니까, 날 내치지 말아줘. 타쿠야 군. 타쿠야 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치고, 버리고, 미워한다. 내가, 타로를? 어떻게 들어도 성립하지 않는 문장이었다. 미무라는 타로의 말에 머릿속이 점점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네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알아서 떠나려는 나를 부여잡는 건지. 눈을 마주 보며 묻고 싶었다.
혹시 나를 좀 더 봐달라는 설움도, 나만 사랑해달라는 욕심도, 더는 괜찮다고 말하기 싫다는 울음도. 내가 너무 크게 외쳐버려서,
모두 너의 귀에 들어가버린 걸까. 또 예전처럼. 너에 대한 마음을 더는 숨기지 못해서, 결국 좋아한다고 말해버린 그때처럼.
칠칠치 못하게, 괜찮다며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고...
“내가 바보였어. 한심했어. 타쿠야 군은 늘 항상 나를 바라봐주었는데. 축제 때 얻은 수박도, 가족들과 함께했던 바비큐도,
내가 오늘 여행도. 내 모든 추억은 미무라 군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 내가 조금만 아파도,
작은 상처라도 생기면 그 어떤 일이든 제치고 달려와 줬는데...나는 그런 타쿠야 군의 호의를 업고 있을 수 없는 짓을 했어.
타쿠야 군은 나를 사랑하니까, 뭐든 다 괜찮다고 해줄 거니까! 내가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믿고 늘 오만하게 행동해서...
결국 타쿠야 군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어. 내 욕망만 우선이었을 뿐, 타쿠야 군의 마음은 전혀 알지 못했어.”
차가워지는 몸뚱어리 사이로 온기가 스며들었다. 아까 전까지 안고 있던 몸이 되려 저를 감싸고 있는 탓이다. 충동적으로,
하지만 더는 놓치기 싫다는 듯이.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너무 그리웠던 온기였다.
애써 외면해왔던 따스함을 마주하니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어째서 헤어지자는 말 같은 걸 내뱉었는지. 네가 싫다고 소리를 쳐도 어떻게든 붙어있어야 했는데. 미무라는 후회했다.
동시에 타로, 타로, 연신 그의 이름을 불러대며 바르작댔다. 최대한 많이 붙어있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여태껏 이러고 싶었다는 듯이 한껏 어리광을 부린 미무라는 천천히 제 욕심을 입밖에 담았다.
너무 꾹꾹 눌러놓은 탓에 뭐 하나 건사하지 못했지만, 그렇기에 서로 엉키고 얽혀 더욱 서글펐던 것들이었다.
“타로, 나는 네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질투했어. 비굴하게 사랑을 재고, 네 안에서 나는 몇 순위일까 고민했지.
하물며 네 가족에게까지도. 지금은 가족의 소중함을 알려준 너희 가족들이 너무나 소중하지만...그럼에도 아직까지 네 시선이,
그 온기가 다 내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려. 그래서 아까 그랬어. 그 사람들을 거절한다면 다음엔 너에게 가지 않을까 해서.
혹시나 네가 그 사람들에게 가버린다면. 내가 질린 거라면.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니까...네가 알려준 사랑은 그런 게 아닌데
난 여전히 그럴 수밖에 없었어. 괜찮다고 마음을 억눌러도 억누른 틈새에서 욕심이 흘러나오는 그런 사람이었어.”
이제 더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 내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아.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어. 이런 나를 받아줬으면 좋겠어.
한평생 비밀로 묻어가리라 다짐했던 욕망도 봇물 터지듯 새어 나왔다. 온갖 크레이터로 엉망진창이 되어있는 뒷면을 어떻게든
보여주지 않으려 발버둥 쳤던 노력이 무색하게, 결국 다 밝혀지고만 달처럼.
“타로.”
미무라는 제가 하나하나 욕심을 털어놓을 때마다 타로의 얼굴이 시시각각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내 말에 네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상처를 입은 걸까, 아니면 그런 마음을 몰라줬다며 조금이라도 후회를 하는 걸까.
몇 년 동안이나 멀리서 타로를 지켜봐 온 미무라는 두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손을 뻗어 부드러운 타로의 눈가를 매만졌다. 울지마. 미무라는 타로의 생각이 후자임을 알았다. 절망과 후회, 죄책감, 그리고 자기혐오. 그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감정이
여태껏 제가 가슴에 품어왔던 것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있었으니까.
미무라는 그런 타로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미무라 가의 사람이 아닌,
그냥 야마다 타로의 연인인 미무라 타쿠야로.
“타로, 이제부터는 정말 솔직하게 대답해줘.”
끄덕. 미무라는 볼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손으로 훔치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같은 소금물인데 이다지 차갑지 않을 수 있나.
네가 흘린 이 눈물은 저 맑은 바다에게 설령 독이 될지언정, 자신에게는 언제나 따뜻하고 소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너처럼 배려 깊고, 헌신적인 사랑은 못 할 운명인가 봐. 늘 그랬듯 노력은 해보겠지만.
내 사랑은 정말 어둡고 치사해서, 어쩔 수 없는 일인데도 마음 한 켠에 서운함을 품을지 몰라. 아니, 분명 그럴 거야. 앞으로도 계속. 지금 눈앞에 있는 네 애인은 그런 사람이야. 내가 질릴지도 모르고, 왜 저러냐며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지. 그
런데도 너는 이런 나를 계속 사랑할 수 있어? 너에게 다가가는 사람을 보며 질투하고 돼? 집에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가지 말라며 고집을 피워도 돼? 질리도록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말해도...돼?”
그 누가 헌신적인 사랑을 최고의 사랑이라 일컬었는가. 미무라는 코웃음쳤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이기에 비로소 욕망을 가지고,
그런 인간이기에 가장 당연하고 매력적인 것은 서로에게 한없이 욕심을 품는 사랑인 것을.
“...타쿠야 군, 고마워. 나를 원해서 고마워. 이런 나를 사랑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그런 당연한 고민을 하게 만들어서.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해서, 타쿠야 군에 비하면 정말 보잘것없는 애인이지만...타쿠야 군이 나를 더 오래 사랑해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질투는 해도 되지만, 그전에 타쿠야 군이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게. 타쿠야 군만 바라보고,
핸드폰은 없지만 타쿠야 군이 보고 싶다고 하면 당장 달려가고. 나는 타쿠야 군 거니까. 타쿠야 군이 나를 원한다고 말한다면,
네가 어디에 있더라도. 평생 죽을 때까지 달려갈게.”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말아줘. 나를 평생 너만의 것으로 해줘.
미무라는 타로의 말에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평생이라니, 그리고 죽을 때까지 달려가겠다니. 참 허무맹랑한 말이었지만,
타로이기에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이기도 했다. 평소라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며,
괜찮다고 고개를 내저을 자신 따윈 지금이 자리에 없었다.
"거짓말하면 바늘 천 개야, 타로."
욕심을 한껏 담은, 긍정의 말. 몇 년만에 이렇게 웃어 보이는 건지.
미무라는 제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 기쁘게 미소 지었다.
저 눈에서 느껴지는 질척한 소유욕은 분명, 거짓이 아닐 것이다. 현대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타로니까. 그리고, 저 사랑 또한. 소유욕 따윈 일부일 뿐이라는 듯, 눈가를 발갛게 물들여놓곤 그런 주제에 환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를 보며 미무라는 사랑을 느꼈다. 야생의 감인지 뭔지, 분명 자신도 그에게 옮아가는 것이라 생각하며.
이소가이와 타로네 가족이 자신들을 발견할 때까지, 타로와 미무라는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마냥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만약 언젠가 저를 향한 타로의 사랑에 확신이 안 서더라도, 이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수 있으리라.
왜냐면 야마다 타로는 미무라 타쿠야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니까.
cf. 소유적인 사랑(mania, 마니아)
헌신적인 사랑(agape, 아가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