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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verland

푸른불꽃 X 천국에서 가장 가까운 남자 2

​쿠시모리 슈이치 X 토도 아유미

*푸른불꽃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묘한 하루였다. 일상에서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하루 종일 기분이 묘했다. 무언가를 자꾸 놓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빼먹은 것이 있나 가방도 뒤져보고 챙겨야할 것들의 리스트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하나하나 맞춰보았지만 빠져있는 것은 없었다. 모든 게 똑같은데. 이상할 것 하나 없는데. 그냥,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애써 아무것도 아닐 거라고, 오히려 이렇게 불안한 날엔 별 일 없이 지나가지 않았느냐고 제 자신을 다래고 또 달랜 아유미는 하루 끝에 서서도 안정을 찾지 못했다. 치에미는 잠에 들었고 아버지는 들어오시지 않았다. 평안한 하루임에 감사해야하는 날임에도, 아유미는 불안했다.

 

 -슈이치가, 필요했다.

 

 

 

=

 

 

 

 “...맨날 자전거 타고 다니면 안 힘들어?”

 

 

 슈이치와 아유미의 첫 만남이었다. 아니 처음으로 말문을 튼 때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서로의 존재는 자각하고 있었다.

슈이치가 늘 지나쳐 달리는 그 바닷가에서 아유미는 곧잘 산책하곤 했으니까.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 풍경에 불과했지만,

그 일상이라는 것의 침투력은 생각보다 강한 것이었다. 슈이치도, 아유미도, 서로를 각자의 일상으로 들인 후부턴 저희 나름대로

친밀감이 쌓여가는 것을 느꼈으니까. 여느 때처럼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줄 알았던 슈이치가 웬일인지 자전거를 끌며 터벅터벅

다가왔을 때, 아유미는 별 거리낌 없이 먼저 말을 붙였다. 슈이치도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터벅터벅 걷던 발걸음을 멈추고 아유미의 곁에 섰을 뿐이었다.

 

 

 “자전거 아니고 로드레이서.”

 

 “그거나, 그거나.”

 

 “......그러는 넌. 이 더운 날 동복 입고 있으면 안 더워?”

 

 

 많이들 하는 질문이었다. 아유미는 절대 그것에 대한 대답을 줄 생각이 없지만.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아유미에 슈이치도

입을 다물었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둘은 한참을 같이 걷기만 했다.

 

 걷고, 또 걸었다.

 

 

 한 번 같이 시간을 보낸 것으로 둘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날들이 늘어났다. 별 다를 거 없었다. 그저 나란히 걷기만 하는 것으로도 슈이치와 아유미는 충분했다. 늘 똑같던 일상이 아주 조금, 달라진 것뿐이었다.

 

 

-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오전까지만 해도 해가 쨍쨍 했으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에선 비가 쏟아져 내렸다.

슈이치는 로드레이서를 학교에 그대로 묶어두는 것을 택했다. 비를 덜 맞으려면 차라리 로드레이서를 타는 것이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로드레이서를 타고 이렇게 강하게 내리는 빗속을 뚫고 무사히 집에 도착할 자신은 없었다. 그냥, 가는 길에 편의점이라도

들르는 게 나았다.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운동화와 그 안의 양말까지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슈이치는

발걸음을 빨리 하기 시작했다.

 

 편의점에서 우산 하나를 사들었지만 이미 젖을 대로 젖은 탓에 별 의미는 없었다. 가방이라도 더 젖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며 어깨를 으쓱인 슈이치는 저 만치 보이는 익숙한 인영에 느려졌던 발걸음을 빨리해야 했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쟤가 진짜-.

 

 

 “......아유미?”

 

 

 비에 잔뜩 젖은 채로 작은 아이 한 명을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 슈이치가 급히 제 우산을 그들에게 씌웠다.

 

 

 “너-”

 

 “......슈이치.”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아유미에 당황한 슈이치가 급하게 아유미를 이끌었다.

 

 어머니와 하루카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인지 집은 조용했다. 이 시간에도 조용한 걸 보면 그 남자는 또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시고 퍼질러 잠이나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숨을 쉰 슈이치가 우선은 아유미에게 수건과 갈아입을 옷가지를 주며 화장실로 들여보냈다. 입술이 파래진 것이 감기에 걸릴까 걱정이었다. 대충 옷을 갈아입은 채 바닥에 떨어진 물기들을 닦아내고 슈이치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제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고 있을 때 쯤, 화장실 문이 열리고 아유미의 품에 있던 아이가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 아유미가 고개를 살짝 내민 채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미안. 동생까지 데려와서....... 치에미, 오빠 친구.”

 

 “안녕하세요오.”

 

 “응, 안녕. ...춥진 않아?”

 

 “응! 안 추워요.”

 

 “일단 내 방 가 있을까? 오빠 씻게.”

 

 “응.”

 

 

 치에미를 제 방으로 데려간 슈이치가 치에미를 침대에 앉혔다. 아유미가 그래도 치에미를 옷으로 감싸 안고 있어서인지 아유미보다는 상태가 나아보였다. 따뜻한 물로 씻고 나서인지 눈에 졸음이 가득한 치에미에 슈이치가 졸리면 한숨 자도 된다며 이불을 덮어주자 곧 꾸물거리며 침대에 누워 색색 숨을 몰아쉬는 치에미였다. 슈이치는 방 불을 꺼준 채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왔다. 따뜻한 무언가라도 마시게 해야겠다 싶어 물을 올리고 그 물이 끓기 시작할 즈음에 아유미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머뭇거리는 아유미에 슈이치가 일단 티백을 넣은 차를 식탁에 올려두었다.

 

 

 “나 좀 씻고 나올게.”

 

 

-

 

 

   사람의 심리는 참 요상하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도 차마 꺼내지 못하던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둔 속마음을, 차라리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게 참. 아는 것이라곤 서로의 이름 밖에 없으면서 아유미는 처음으로 속 시원하게 제 상처를

슈이치에게 내보였다. 처음으로, 나약한 제 속 안의 것을 내비추었다. 슈이치는 덤덤하게 그런 아유미의 곁을 지켰다.

몸을 들썩이며 우는, 하지만 그마저도 시원하게 뱉지 못하는 아유미에게, 슈이치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당황해서 생각 없이 반팔을 쥐어 줘버린 탓에 드러난 아유미의 팔은, 처참했다. 더운 여름에도 늘 동복을 입고 있던 아유미를

고려했어야 했는데. 슈이치는 자신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여태 혼자 끙끙 앓았을 아유미가 안타깝고, 또...... 동질감이 들어서.

슈이치는 손을 뻗어 아유미의 손가락 끝을 아주 살짝 잡았다.

 

 슈이치가 내준 차가 다 식도록, 아유미는 울고 또 울었다.

 

 

-

 

 

 그 날을 기점으로 둘은 교류가 더 늘었다. 늘 그렇듯 바다 근처를 걷기도 했고 가끔은 슈이치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뭐든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조금 더 쉬운 법이었으니까.

  

 아유미는 슈이치와의 시간이 좋았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아서. 딱히 하는 것도 없으면서 슈이치와 함께 있으면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라서. 그래서 매일같이 슈이치와 만나던 곳을 찾았다.

그럼 슈이치도 어느 순간 제 옆에 와 앉는 것이었다.

 

 집이고 학교고 아유미는 온전치 못했다. 휴식처가 되어야할 집에서도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할 학교에서도 아유미는

치에미를 위해서,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누구보다 빨리 어른이 되어야했다. 아직 나약하고 기댈 곳이 필요한 어린아이임에도.

그 누구도 아유미 그 자체를 받아들여주지 못했다. 자신은 어른이어야 했기에 늘 괜찮다고 다독여왔지만, 결국 지치기 마련이었다.

그 지치는 순간들을 달래주는 건 슈이치가 유일했다. 슈이치와 함께 하는 그 짧은 시간이, 아유미에게는 구원이었다.

 

 슈이치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그 무거운 짐을 감당하기 위해 더 독해지고 치밀해져야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하는 것을 위해서 슈이치 또한 성급히 어른이 되고자 했기에. 아유미와의 시간만이 느긋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때였다. 슈이치에게 아유미는 휴식이었다.

 

 

 “네버랜드?”

 

 

 여느 때처럼 아유미와 마주한 슈이치가 가방에서 꺼내든 건, 그림이었다.

하늘을 날아 구름 속에서 함께 웃고 있는 두 명의 아이들이 그려진.

 

 Neverland. 작품명이었다. 슈이치는 그 그림을 아유미에게 주었다. 애초부터, 아유미를 위해 그렸다고, 슈이치는 그렇게 말했다.

아유미만을 위한,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선물이었다.

 

 

 “이거. 너랑 나야?”

 

 “응.”

 

 “뭐야. 나 하나도 안 닮았어.”

 

 “그림이 훨 낫지?”

 

 

 

 아유미가 눈을 흘기며 슈이치를 한 대 치자, 슈이치가 낄낄대며 웃었다.

 

 아유미에겐 말 하지 않았지만, 슈이치의 작은 소망이었다. 어쩌면 너무 빠르게 어른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둘에게 가장 필요한 곳.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며 그저 지금처럼 연약한 아이 그 자체로 남아 영원을 만끽할 수 있는 곳. 아유미의 손을 붙들고,

지긋지긋하게 서로를 옭아매는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둘만의 네버랜드로 떠나는 것.

 

 

-

 

  

 슈이치의 아버지가 죽었다.

 

 ...슈이치는 한동안 아유미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

 

 

 7일.

 

 슈이치를 만나지 못한 채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유미는 변함없이 늘 그곳에 있었다. 오늘은 오겠지, 오늘은 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늘 그곳에 가 멍하니 바다를 보며 앉아 있다가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슈이치를 만나지 못한 시간동안

아유미는 슈이치의 그림을 보고 또 보았다. 혹시나 제 아버지가 그림을 보고 함부로 버리거나 망가뜨릴 것이 무서워

꽁꽁 숨겨두기까지 했다. 쪼그리고 앉아서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날아올라 네버랜드로 향하고 있는 두 소년을 보고 있으면

아유미는 제 일상에 위로를 건네는 기분이었다.

 

 

 

 “치에미. 피터팬 알아?”

 

 “응. 웬디랑 팅커벨도 나오는 거.”

 

 “그럼 네버랜드도 알겠네?”

 

 “응! 피터팬이랑 팅커벨이 사는 곳.”

 

 “치에미는 거기가 어딘지 알아?”

 

 “으응. 몰라. 근데 선생님이 우리는 다 갈 수 있는 곳이라고 그랬어.”

 

 “우리?”

 

 “응. 애들은 다 갈 수 있대.”

 

 

 

 그렇구나.

 

 있지, 치에미. 그럼 나는 너무 늦은 걸까?

 

 

-

 

 

 “......왔어?”

 

 “응.”

 

 

 이 주 가량의 시간이 지나서야 아유미는 슈이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여전히 멍하니 앉아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던 아유미의 곁에, 슈이치가 조용히 다가와 앉았다. 안 본 사이에 더 날카로워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유미는 굳이 묻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그저 제 곁에 있어주던 그 날의 슈이치처럼, 아유미도 조용히 슈이치의 옆에 있기를 택했다. 살짝 닿아오는

어깨와 그 덕에 느껴지는 작은 온기에 아유미는 안심했다. 슈이치는 만족했다.

 

 그래도 그 고요함을 깨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 작은 온기를 기다리면서 몇 번이고 되뇌었던 말이 있었다.

 

 

 “슈이치.”

 

 “응.”

 

 “보고 싶었어.”

 

 

 

 햇살이 닿아 아유미의 미소가 밝게 빛났다. 슈이치는 그런 아유미를 보며 망설였다.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서 아유미를 찾아온 것이었는데. 자신이 없었다. 맑게 웃어 보이는 아유미에게 차마 속 안의 것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의 진실을, 또 앞으로의 결심을. 슈이치는 그것들을 꾹꾹 눌러 담아야 했다. 아유미의 미소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슈이치는 아유미를 따라 웃어보였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당장은, 웃으며 넘기기로 했다.

 

 

 

 

 

=

 

 

 

 

 아유미는 냅다 달렸다. 어제부터 알 수 없이 피어오르는 불안함을, 해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슈이치가

모습을 보이질 않았다. 항상 만나던 그 장소에, 슈이치가 나오질 않았다. 지난번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어제 하루 종일 자기 자신을 옭아매던 불안함의 끝이 슈이치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유미는 그대로 제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슈이치의 집은 이제 눈 감고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가서, 슈이치를 만나야 했다. 지금, 당장.

 

 

 “슈이치!!!!! 슈이치!!!!”

 

 

 아유미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하지만 굳게 잠긴 문 너머의 공간은 무서우리만큼 고요했다.

몇 번을 더 문을 두드리며 슈이치를 찾은 아유미였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도 없으니 그냥 돌아가면 될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게 되지 않았다. 자꾸만, 슈이치가 어제 헤어지면서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시덥지 않은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슈이치의 어깨를 툭 쳤었지만, 어제의 그 불안함은 분명 그 문장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맞았다.

 

 

 ‘네버랜드에서 기다릴게-’

 

 

 아유미는 한참을 집 앞에서 서성였다.

 

 

 

-

 

 

 

 사고사라고 했다.

 

 그 날 아유미를 괴롭혔던 불안함은 틀리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다. 다시 슈이치의 집을 찾았을 때

슈이치의 여동생이라는 아이가 나와서 어떤 물건을 전해주며, 울면서 제게 그 날의 사고를 말해주었다.

로드레이서를 타다가 트럭이 달려오는 것을 보지 못해 그대로 그 자리에서 사망했노라고.

 

 아유미는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슈이치의 물건을 받았을 뿐이었다.

 

 

 

 “......이건, 드려야할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끝으로 동생은 집으로 들어갔다. 아유미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제 손에 쥐어진 슈이치의 물건을 멍하니 바라보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슈이치가, 죽었다.

 

 

 

 

 

 

 

 

 

 

 

===

 

 

 

 

 몇 년 만의 찾은 바다는 여전히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유미와 슈이치가 걷던 그 길도, 부서지던 파도도, 모든 걸 태워버릴 듯이 뜨거운 태양도.

 

 변한 건 아유미 뿐이었다.

 

 이제 교복은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이렇게 강한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날에도, 마음 편히 짧은 소매의 옷을 입을 수 있어졌으니까.

 어린 날의 제가 그토록 염원하던, 어른이 되었으니까.

 18살의 슈이치를 두고, 아유미만 홀로 22살의 성인이 되었으니까.

 

 어른이란 건 별 거 없었다. 어린 날의 저희들보다 더 성숙하지도, 그렇다고 평온하지도 않았다. 그저 다 똑같은 사람들이었다.

나 자신과 내 주변을 지킬 방법은 빨리 어른이 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약한 건 지금도 별 반 다를 거 없었다.

어쩌면 어린 날의 저와 슈이치가 더 강인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아유미는 메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카세트 테이프였다. 그 때 슈이치의 동생이 전해주었던 그것. 전해 받고서도

아유미는 한동안 그 테이프를 보관만 하고 있었다. 뜨겁고 눅눅했던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가을과 유난히 추웠던 겨울을 지내고서야 아유미는 겨우 그림과 함께 숨겨두었던 테이프를 꺼내들 수 있었다. 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아유미도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 했다. 학교에서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선, 아직 손도 대지 못한 숙제를 풀어야만 했다. 슈이치가 남긴 마지막을, 확인해야만 했다.

 

 슈이치가 남긴 테이프를 듣고 나서야 아유미는 차마 내뱉지 못했던 서글픔을 터트릴 수 있었다.

슈이치의 음성이 녹아들어있는 그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다.

테이프에 남아있는 음성이 아니면 슈이치와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가혹해서 아유미는 몇 번이고 테이프를 되감았었다.

 

 지금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횟수만 줄었을 뿐이지 여전히 아유미는 종종 이 테이프를 듣곤 한다.

이제는 집 벽에 소중히 걸어둔 그 그림과 함께, 아유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슈이치와 닿기 위해 애썼다.

성인이 되어버린 아유미는 갈 수 없는 네버랜드에, 자신의 마음이라도 닿길 바라면서.

 

 사고가 아니었다.

 슈이치는, 여행을 떠났을 뿐이다.

 어른이 되지 않아도 되는 네버랜드를, 슈이치는 찾았을 뿐이다.

 

 아유미는 익숙하게 테이프를 재생시켰다.

 

 

 

로드레이서. 로드레이서에 탔을 때 보이는 세계. 엄마가 만들어준 요리.

하루카의 화난 얼굴. 다이몬의 서툰 그림. 오이카와의 농담.

잠꼬대를 하는 개. IW 하퍼 101. 북경어로 노래 부르는 왕비.

지단의 드리블.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 톰 웨이츠의 목소리.

바삭하게 구운 베이컨. 구멍이 안 난 도너츠. 머리가 아프지 않은 빙수.

바다거북이의 산란. 조심스럽게 우는 매미. 단색이 아닌 팬더.

밑이 뚫린 포켓. 하나도 안 아픈 주사. 마지막까지 쓴 치약.

끝없이 이어지는 파란불. 아무도 모르는 길.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테스트.

 

......그리고, 토도 아유미.

[호롱달] @horong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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