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와 호박 소년
푸른 불꽃 X 라플라스의 마녀
쿠시모리 슈이치 X 아오에 슈스케
“ 하아... ”
어두운 하늘에 구름이 작게 피어올랐다. 연기도 풍선도 아닌 것이 승천할 듯이 하늘 높이 퍼지려다 금세 사라지는 걸 보아하니
되도 않은 잡생각만 많아졌다. 트레이닝복 지퍼를 목까지 올려 잠근 아오에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밤공기가 차가운 만큼 피어오르는 숨결에 어쩐지 유령이란 비과학적인 명사가 떠올랐다. 늘 거기서 거기인 산책길이 오늘따라 어둡고 추운 것만 같아서, 그 분위기가 어쩐지 불편하고 또 흥미로웠다. 저 편에서 형태를 알 수 없는 물체가 나를 바라볼 듯한,
왠지 기묘한 일이 벌어질 듯한, 더 생각하기를 관둔 아오에가 힘빠진 어깨를 탁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나이도 적당히 먹어야지. 과학으로 밥 벌어 먹는 인간이라 자처하기엔 창피한, 꽤나 오컬트스러운 망상이었다.
한뜻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아오에는 괜시리 소름이 돋아 코를 훌쩍였다.
“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건지... ”
“ 교수님? ”
글쎄, 무슨 날이었지. 어쩌다 이런 생각이 나타난 거지. 피곤한 눈가를 누르며 쓸데없는 꿈을 복기했다. 누가 말한 것 같은데.
내가 그랬던가, 누가 그랬지. 미지칭도 부정칭도 아닌 것이 정말 의미도 없이 의문을 돋우었다. 아무도 없는 언덕에 앉아,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찾아오는 그 날에, 모두가 받아들여주지 않는 문을 열겠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 이전에 누구의 손을 잡고 말한 건지. 안 그래도 흐릿한 기억을 더 희미하게 덧칠하려는 듯 안개는 짙어져만 갔다.
“ 교수님, 듣고 있어요? ”
“ 어, 응? ”
미안해. 잠시 딴 생각을 했네. 아오에는 시린 손으로 들고 있던 전화기를 반대쪽 손으로 바꿔들었다. 하아, 전화기 너머 마도카의
한숨이 직접 보는 것보다 더욱 실감나게 와 닿았다. 미안하다니까, 야밤에 집 근처 공원을 산책하면서 전화기 너머로 귓구녕이 막혔냐며 불평하는 여자아이를 달래는 노총각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짠한 장면이었다.
“ 교수님은 늘 내게 어딘가 엇나가 있다고 그랬잖아요. 내 생각엔 결국 교수님이나 나나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
“ 그러니까 미안하대도.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지? ”
“ 할로윈이요. ”
할로윈? 생전 처음 듣는다는 듯한 반응에 그럼 그렇지란 침묵을 고수한 마도카는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아오에를 꾸짖듯 쏘아붙였다.
“ 설마 할로윈을 모르는 건 아니죠? ”
“ 에이, 설마. 그렇구나, 할로윈... ”
얘기했잖아요. 할로윈에 겐토 군을 볼 것 같다고. 헤에, 그래? 잘됐다. 아무런 감흥 없는 순수한 축하의 목소리에
더 이상 이 무념무상한 교수를 들볶는 것을 포기하기로 한 마도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 그래서 말이에요, 요즘 남자애는 뭘 주면 좋아할까요. ”
“ 요즘 남자애와 나는 거리가 꽤 있지 않나? ”
“ 어쩔 수 없잖아요, 주변에 남자라곤 교수님 정도밖에 없는데. ”
다케오 씨라던가. 그 사람은 영 우유부단해서 적합하지 않아요. 분명 지금도 근처에 있을 텐데 잘도 시원스럽게 말하는 마도카에
아오에는 피식 웃으며 다시 전화기를 다른 손에 바꿔 들었다.
“ 과자라던가 사탕이라던가. 할로윈에는 그런 게 많잖아. 나도 그런 데에는 괜찮은 조언을 주는 게 어렵지만,
분명 겐토 군은 마도카가 무엇을 주든 고맙게 받을 거야. ”
“ 하긴 그렇겠죠. ”
그래도, 아니. 모르겠다, 더 생각하는 것도 복잡하니 안 할래요. 그냥 밖에 나가서 제일 먼저 보이는 걸 살 거야. 그 당찬 발언으로부터 딱 3일 후 겐토에게 할로윈 선물로 칫솔 세트를 선물했다는 말이 나올 거라는 사실은 예상치 못한 아오에는 그저 변덕쟁이 여자애의 어리광에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좋아요, 교수님. 상담 들어줘서 고마워요. 그럼 끊을게요. ”
“ 어, 잠깐만, 마도카. ”
마도카의 쿨한 끝맺음에 아오에는 다급하게 전화를 부여잡았다. 무슨 일이에요? 마도카의 말에 아오에는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도착한 공원 한 편에 멀뚱히 서서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말하기를 망설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저 감이라고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현실의 극치겠지만 이렇게 뻔하고 흔한
산책길에서 불안해지는 심정 또한 과학적으로 설명할 부분은 아니었다. 방금 전 내가 내뱉은 숨결이 사라지는 게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이 싸늘한 기운의 끝자락에 정말 무언가가 있는 걸까. 철없이 튀어나온 호기심과 그에 따라 비례적으로 커지는 심장 박동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적어도 중년이 되어서 생긴 감 치고는. 아오에는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누르며 주변을 살폈다.
“ 교수님, 무슨 일이냐니까요. ”
그리고 결국 참다못해 아오에의 집중을 깨버린 마도카가 질렸다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어째 내 주변에는 답답한 사람들밖에 없어... 그 말에 제대로 찔린 답답한 사람은 뻘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미안, 오늘따라 정신이 없네. ”
“ 난 더 이상 교수님을 믿지 못하겠어요. ”
“ 미안하대도. ”
“ 됐으니까 빨리 용건만 말해요. ”
상당히 피곤해 보이는 마도카의 목소리에 아오에는 그 사이 늘어난 소녀의 인내심에 감탄하며 절반은 뿌듯한 마음으로,
절반은 멋쩍은 마음으로 빠르게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말야, 할로윈이라고 했잖아.
“ 혹시 할로윈이 무슨 날인지 알아? ”
“ 농담으로 하는 말이에요? ”
“ 아니, 단지... ”
“ 단지? ”
“ 할로윈에 유령이 나온다는 전설이라든가. 뭐 그런 게 실제로 있을 법하냐는 소리지. ”
너라면 알 거 같아서. 현직 지구 과학 교수의 뜬금없고 바보같은 질문에 무언가 의심스러운 듯 잠시 말이 없던 마도카는
얼마 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 글쎄요, 아직 만나 본 적은 없어서. ”
“ 멍청한 소리라는 건 알지만, 그냥 말 좀 해봤어. ”
“ 그런 것 같네요. ”
유령이라든지 귀신이라든지. 지금까지 생각해본 적도 굳이 떠올려 본 적도 없지만 요즘 들어 이상하게도 이유 없이 몸이 오싹해진다.
정말 의문일 뿐이지만 살면서 겪어본 일들을 생각해보면 그것을 단순히 기분 탓으로 취급할 것은 아니었기에
더욱 신경이 쓰이는것이다. 그래, 예를 들면 지금도 내 앞에 보이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저 안개 덩어리라든가.
떠올리지 않아도 떠오르는 의미 없는 꿈이라든가.
“ 그럼 만약에 귀신을 만난다면... ”
아오에의 말에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끊겼다. 만약에, 만약이라고 해도 죽었던 누군가가 되돌아올 수 있다면. 폭풍의 한 가운데서 사람은 사라졌지만 남은 이들이 흘렸던 눈물은 아직도 논리를 무시하고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눈물의 토대로 쌓아진 것이 이 몸
그 자체겠지. 마도카는 차분히 제 손을 응시했다. 차분히, 말없이. 작았던 손바닥을 바라보며 주먹을 쥐었다.
“ ...만나지 않을 거에요. ”
그럼. 망설임 없이 끊긴 전화에 남은 잔음이 아오에의 귀에 울려퍼졌다. 이명처럼 흐르고 흐르는 소리에 보이지 않던 형체를 바라보다 넋을 놓을 듯한 그 순간, 아오에의 숨결이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 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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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에의 발끝 앞에서, 존재할 수 없어야 하는 무언가가 허공에서 흔들리며 제 모습을 찾아갔다. 안개도 한숨도 아닌 것이 몽롱하게
흘러가며 점차 뭉쳐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소리를 지르거나, 꿈같지도 않다며 탄식을 내뱉거나. 인간으로서 가능한 행동 중 실행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바람이 몸을 파랗게 옭아매서, 공기가 입을 강하게 틀어막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그것이 서서히 일렁이더니 인간의 형태로 변한 후 아오에의 눈 앞에서 ‘그’가 되었을 때까지, 아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던 것이 발이 되고, 무릎이 되며 급기야 명치까지 올라왔다. 점점 시선이 올라가며 현기증을 느낀 아오에는
기어이 그것의 어깨까지 눈길이 닿자 입술을 꾹 깨물며 눈을 감았다.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은 기분을 도대체 무어라 해야 할까.
결코 빈약하다고는 할 수 없는 어휘력이 유아 퇴행이라도 온 듯 깜깜히 막혀버렸다.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 속에서
뜨겁고, 차갑게. 토라도 나올 것처럼 역겨웠다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워져 아오에의 안쪽을 제멋대로 휘저었다.
“ 헉,헉..........우욱.... ”
어떻게 생각해도 반갑진 않은 이 기묘한 감각이 아오에의 전신을 휘감았다 바람에 촛불이 꺼지듯 돌연 사라졌다. 잠시 진공 상태에
머물고 온 듯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아오에는 제 목을 움켜잡았다. 거칠었던 숨이 다시 고요해지며 고인 눈물이 바닥에 하나둘
떨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었는지, 어떤 현상이었는지 알아챌 수도 알아낼 수도 없이 찾아왔다 떠나간 그 순간을 복기하며 아오에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 ....군. ”
나오지 못할 이름을 들으며, 아오에의 눈 앞의 그것이 움직였다.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명사 대신 공기만 쌕쌕 소리를 내며 빠져나오자 서서히 발을 내딛는 그것을 보며 아오에는 눈을 껌벅였다. 낡은 운동화, 익숙한 검은 바지, 그보다 더 낯익은 반팔 와이셔츠.
그리고 그 위에는, 제 동공에 비치는 주황색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오에가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호박? ”
그것은, 호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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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웃기지도 않아, 호박이라니. 그것은, 호박이었다. 그런 단순한 문장으로 끝날 게 아니라고. 뭐가 호박이야, 호박은.
하다하다 제 눈에 태클을 건 아오에는 잠시 미간을 짚었다, 턱을 괴었다, 눈을 부볐다 다시 호박을 바라봤다.
그래, 그것은 분명히 호박이었다.
“ 아니라고! ”
저도 모르게 욱해버린 데시벨에 그것이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서자 아오에는 앗,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은, 아니지.
이제 그것이 표현하기에도 멋쩍다. 호박이니 그것이니 일단 확실히 해두자. 어디선가 이해 못할 표현에 의문을 가질 제 3자를 위해
아오에는 심호흡을 하며 다시 ‘그것’을 주시했다. 호박, 그것, 무언가, 존재할 수 없는 것. 소시민의 시선에서 정리하자면 일단은
소년이었다. 더 자세하게는 호박을 뒤집어 쓴 소년. 그것이 아오에의 쇼크를 유도한 존재였다. 바로 저 소년이. 아직도 멀찍이서
제 눈치만 살피는 소년에 연장자로서 미안함을 느낀 아오에는 손을 내밀어 소년에게 보이도록 제 쪽으로 흔들었다.
“ 저기, 학생. ”
학생이 맞나? 학생이라고 해도 되나. 일단은 교복같아 보이는데. 좀체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소년을 다시 보니 본인도 무언가 헷갈리는지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길래 아오에는 미확인 물체의 발견자 겸 어른으로서 소년에게 간단한 명칭을 붙여주기로 했다.
소년, 학생, 그것, 타나카 군, 스즈키 군, 사토 군... 하나씩 시도해보면 할수록 전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고개를 저으며 급기야
락스타마냥 헤드벵잉을 돌리는 모습에 살짝 질린 아오에는 잠시 한숨을 쉬다 소년의 머리를 차지하는 호박에 눈을 돌리곤 입을 열었다.
“ ...호박...군? ”
그나마 나았던 건지, 아니면 적절한 답안이었는지 잠시 고민하다 무거운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에게 결국 호박 군이라는 명칭을 붙여준 아오에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호박 군에게 손을 내밀었다.
“ 아까는 소리 질러서 미안해, 호박 군. ”
“ ... ”
“ 혹시 말을... 못하니? ”
아까와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인 호박 군을 약간 의심스럽다는 듯 주시한 아오에는 갑자기 몸을 틀어 다가오는 호박 군을 향해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 아, 아니 그게. 뭐라고 한 게 아니라. 그냥 나는... 어? ”
아오에가 뭐라 변명하든 별 반응도 없이 호박 군은 성큼성큼 다가가 아오에의 팔을 잡았다. 어? 저기, 호박 군. 그리고는 망설임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의문과 질문을 싸그리 무시한 호박 군은 아오에를 질질 끌고 안개가 짙어진 쪽을 향해 걸어갔다.
“ ...호박 군?! ”
미확인 물체를 발견하고 이름을 지어줬더니 끌려갔어요. 그래, 그것이 그렇게까지 말이 안 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적어도 현직 지구과학 교수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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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멀었어? ”
처음 만난 소년을 따라가기를 3시간 째, 서서히 지치기 시작한 아오에가 묵묵히 제 손을 잡아 이끄는 호박 군에게 불평을 시작했다.
제 3자가 본다면 저보다 곱절은 어려보이는 소년에게 칭얼거리는 철없는 아저씨 같겠지만 알게 뭔가. 실제로 저 소년이 인간일
가능성도 낮고, 거의 없다고 봐야 하나. 뭘 제대로 정의하기에도 어려운 정신에 아오에는 그저 눈 앞의 호박을 따라 발을 움직였다.
그래, 인간이 아니겠지. 분명 그럴 거야. 그렇게 따지자면 인간이 아닌 것에게 끌려가고 있는 이 상황 또한 그리 안전하다 장담할 순
없겠지만. 그렇지만, 손을 뿌리칠 생각 따윈 처음부터 단 한 순간도 없었던 아오에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현실과 다른 풍경,
끝이 없는 길, 눈을 감아도 계속 보이는 선명한 주황색. 이 길이 어느 곳으로 날 인도하더라도 좋으니까, 그냥 널 따라가고 싶어.
그 때도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도망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는데. 죽어도 널 따라가겠다고.
“ ...그 때? ”
그 때가 뭔데. 정말 노망이 들었나. 기억에도 없는 게 자꾸 튀어나와. 계속 떠오르는 낯선 장면에 아오에가 기억을 되짚어보려 회상에
막 들어가려 하는 순간, 앞에서 멈추는 느낌에 자연스럽게 눈을 뜨고 입을 벌렸다.
“ 바다... ”
살짝 서늘하지만 기분 좋은 바닷바람이 아오에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간간이 들리는 파도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바다 냄새, 꿉꿉하지만 싫진 않은 밤바다의 그 냄새. 함께 걷고 싶던 어느 날의 풍경. 상상치도 못한 도착에 아오에는 흥분한 듯
숨을 세게 쉬며 호박 군을 돌아보았다.
“ 내게 여기를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
“ ... ”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모습이었지만 어쩐지 본인도 들떠 보이는 움직임에 아오에는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왜인지는
몰라도 최근 들어 이런 데에 오고 싶었는데. 이걸 최근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응, 요즈음에. 시답잖은 소리를 해대며
모래사장의 가장자리를 자박자박 밟자 호박 군이 제 이야기를 들으려는 듯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하하, 힘빠진 어깨로 호탕하게 웃은 아오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 잘 기억은 안 나는데, 누구랑 약속했어. 여기에, 이런 곳에 오자고. ”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기억난다. 이름까지는 아닌데. 언제 만났지. 맞아, 고등학교 때였어. 우리도 호박 군이랑 비슷한 교복이었거든.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선명하게는 아닌데, 방과후에 그 애랑 같이 집에 갔지. 가는 길이 비슷해서. 나는 중간까지만 같이 가고 버스를
탔지만. 그 애는 자전거가 있었는데 늘 나랑 같이 갈 때는 옆에서 끌고 갔어. 태워주겠다고 했지만 무서워서 거절했지.
선명하지 않다고 해놓고선 세세하게도 말하는 아오에의 뒤에서 호박 군은 조용히 따라 걸었다.
“ 그 애를 좋아했어. ”
그 말에 뒤에서 묵묵히 걷던 발이 멈췄다. 어디 걸렸나? 갑작스런 중단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아오에는 다시 바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좋아했었어, 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고등학교 때고, 한참 전의 일이니까. 파도도 치고 바람도 부는 바다가 유난히 고요했다.
“ 아마 러브레터도 줬을 걸? 물론 그 다음 날에 그 애가 전학을 가서 답은 못 듣고 끝났지만.
얼마 안 되어서 나도 그 학교를 떠나서 더 알 수 없게 되었지. ”
어떻게 지내려나. 잘 살고 있을까? 호박 군은 그런 애가 있니? 아오에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호박 군은 몸을 홱 돌리더니 아오에의 손을 잡았다. 인간이 아닌 것의 감촉 치고는 꽤나 따뜻하고, 차갑기도 해서 아오에는 괜히 어색한 마음에 장난스레 잡힌 손을 흔들었다.
“ 호박 군은 재밌네. 멋대로야,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고. 그 애랑 닮았어. ”
제멋대로에 기분파이기도 하고, 가끔 사고도 치고. 가끔이 아니라 꽤 자주다. 자유분방하고 어딘가 날아갈 것만 같은 이상한 사람.
아직도 그 때의 기분이 떠올라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는 건 분명 그립기 때문이겠지. 내가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불편한 감정을 그 때
다 얻은 것 같아. 불편하기 때문에 계속 마음에 남아있고 언제까지고 툭하면 떠오르는 이 감정. 하굣길에 들리던 고양이 소리,
아이스크림 두 개. 라디오 소리, 풀 냄새. 모든 게 떠오를 듯 말 듯 헷갈렸다. 그리고 손도,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손이.
어쩌다 잡은 손이...
“ ... ”
손을 잡은 채 아오에의 얼굴이 굳자 호박 군은 아오에의 손을 이끌어 바다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전철 속으로 들어갔다. 전철에 흐르는 물줄기가 창문을 뒤덮고 바다를 다시 적시자, 라디오 소리가 옅게 들리며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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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집에 가서 읽어봐!]
[지금 읽으면 안 돼?]
[절대 안 돼! 집에 가져가서 혼자 봐!]
[뭐길래 그런대.]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막 저주 같은 거 아냐?]
[아 진짜!]
[미안, 미안. 알았다니까, 그럼 나 간다!]
[꼭 봐야 해! 보고, 내일 답장해!]
[알겠어!]
내일 말해준다고 그랬잖아. 그렇게 사라지는 게 어딨어. 요즘은 드라마도 그렇게 안 한다. 갑자기 전학이라니. 웃기지마,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앳된 얼굴로 편지를 건네주던 소년은 눈물을 닦고 있었다. 현관문 앞에 한참동안 서서,
얼굴이 뭉개질 정도로 소매를 눈물로 적시다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왜 그가 사라졌던 건지. 정말로 모르는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편지를 책상에 놔둔 채 그 날의 밤이 지나갔었다.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호박 군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아오에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덜컹거리는 전철이 양옆으로 움직이면서 둘은,
두 명의 몸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서로가 서로의 몸을 지탱해주면 좋았겠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그럴 힘이 없어서, 아오에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편지를 받은 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대답을 받지 못하고 그 애는 떠난 거지. 잘 생각해봐, 모든 게 네가 편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잖아. 너무나 편해서,
불편함을 견딜 수 없어 너조차 그 거짓말에 속아버릴 정도로. 꿈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히 아오에 자신의 목소리였다.
정확히 말하면, 그 시절의 목소리.
[꿈과 현실, 망상과 진실의 경계가 무뎌지는 날. 그 아이가 찾아온 것이 현실이 아니었고
네가 지금껏 믿어온 과거는 진실이 아니었지. 그리고 지금은 네가 숨겨둔 진실을 알 때야.]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아오에가 의자에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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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떡하지, 진짜 줘버렸어! 어떡하지... ]
친구로도 안 봐주는 거 아니야? 내일부터 어색해지면 어떡하지... 손톱을 잘근 잘근 씹던 아오에는 책상 위 수십 번은 썼다 지운
실패작들을 치우며 이미 제 손을 떠난 성공작을 후회했다. 차라리 주지 말걸. 줘도 2학기에 줄걸! 우는 소리를 내며 종이들을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자, 초인종 소리가 집 안에 크게 울려퍼졌다.
[ 누구세,어,에,엥?! 잠깐만, 왜, 왜?!]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에 인터폰을 부셔라 눌러버린 아오에는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바들바들 갓 태어난 사슴처럼
현관문을 향했다. 방금 그 성공작을 받은 인간이 지금 제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기절할 것 같은데, 입이라도 한 번
열면 진짜 쓰러지는 거 아냐? 수십 번을 고민하던 아오에는 결국 오늘따라 유난히 무거운 손잡이를 내렸고,
문이 열리며 그의 얼굴이 보였다.
[ ...슈스케. ]
그 아이의 볼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
.
.
“ ... ”
흔들리던 전철이 멈추고 호박 군은 아오에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감았던 눈을 뜬 아오에는 말없이 일어나 호박 군을 따라 걸었다.
어딘지도 모를 길을 조금 걷고 나자, 학교가 보였다. 우리가 만난 학교, 결국 만나지 못했던 장소. 호박 군이 멈춰 서 아오에를 돌아보자 아오에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 오랜만이야, 슈이치. ”
살짝 망설이는 듯 하더니, 아오에는 호박 군에게 다가갔다.
“ 내가… 아직도 미워? “
어린애같은 말을 내뱉는 것도 창피한데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다. 하지만 그런 수치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아오에는 말을 이었다.
“ 미안해, 잘못했어. 너를 잊어서, 모른 척 해서, 널 위해 모든 걸 해주겠다는 식으로 말해놓고선
결국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겁쟁이여서, 내가 그런 사람이어서 미안해. 용서해줘. “
그 때 너는 내게 찾아와 말했었다. 살려달라고. 제발 자신을 구해달라고. 어린 나는, 널 좋아했던 나는 널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하는 와중에 단지 네가 날 좋아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널 위해서 모든 것을 해주겠다고.
[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모든 걸 해줄게, 난 널 좋아하니까, 슈이치. ]
[ …………...미안해, 슈스케. ]
그리고 그 대답을 들은 너는 그 날 죽었다.
“ 미안해, 슈이치. “
넌 알았던 거겠지. 내가 한 말은 위선에 불과한, 단지 네게 사랑받기 위해 내뱉은 거짓말이었다고. 그리고 결국 그래서 네가 사라진거야. 네 희망을 짓밟은 건 나였다고. 아오에는 눈물을 흘리며 호박 군의 손을 잡았다.
“ 제발, 제발 나를 용서해줘… “
한심하게도 널 좋아한 나를, 거짓말을 하며 네 희망을 망친 나를, 도저히 구제할 길을 없는 나같은 쓰레기를. 아오에의 부들거리는
손을 마주잡은 호박 군은 아오에를 지그시 바라봤다.
“ 슈스케. “
그리고, 입을 열었다.
.
.
.
“ 난 단 한 번도 널 미워한 적 없어. 우린 서로에게 있어 꽤나 행복한 세상이었고, 모든 건 네 책임이 아니니까. “
슈이치의 목소리. 아오에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눈물이 쉬지도 않고 다시 튀어나왔다. 너무도 그리웠던 네 목소리. 네 목소리가 맞아. 아오에는 호박 군의 손을 잡은 채 목이 쉬어라 울었다.
“ 아니야, 내 잘못이야. 네가… “
“ 네 덕에 행복했던 게? “
“ … “
호박 군이 피식 웃는 소리를 내었다. 있잖아, 슈스케. 우린 너무 어렸고 그 때문에 많이도 아팠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픔으로
행복을 덮을 필요는 없지. 난 너와 있어 행복했어. 그리고, 호박 군은 아오에의 손을 놓았다.
“ 나는 그 날의 대답을 하러 왔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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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군의 대답이 끝나고, 눈이 퉁퉁 불어 눈 앞이 흐릿한 아오에는 비틀거리며 전철에 다시 올라 앉았다.
호박 군은 아오에의 바로 앞에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 그렇게 울어. “
“ 이 나이 되어봐. 눈물샘만 약해지지. “
“ 안 되어서 다행이네. “
“ 슈이치. “
“ 미안해. “
내가 잘못했으니까 다시 울지만 마. 호박 군이 아오에의 얼굴을 쓰다듬자
또 그 따뜻하고 차가운 손길에 눈을 감은 채 아오에는 입을 열었다.
“ 저기 슈이치. “
“ 응, 슈스케. “
“ 정말 나한테 화 안 났어? “
“ 당연하지. “
그럼 왜 처음에는 말도 안 했어? 지금도, 얼굴도 안 보여주고. 약간의 불만이 들어간 목소리에 호박 군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 시간은 지나가야 하니까. “
전철이 다시 흔들렸다. 하지만 둘 중 그 누구의 몸도 불안정하게 휘청이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이제 각자의 시간이 생겨버린 순간. 멈춰버린 호박과 멈출 수 없는 인간이 서로를 마주보았다.
“ 슈스케, 너무 울지 마. 앞으로도, 쭉. “
미안해하지도 말고. 넌 잘못한 거 없어. 그리고 좀 더 뻔뻔하게 살아봐. 이상한 거 쓴 사람 아무나 따라가지 말고. 나라서 망정이지
웬 변태였으면 어쩔 뻔했어. 장난스레 하는 말이지만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아오에는 살짝 웃었다. 아직도 눈물은 매달린 채로.
“ 왜, 슈이치가 계속 지켜주면 되잖아. “
“ 내가 왜 호박을 썼겠어. “
너한테 호박 군이라는 소리나 듣고. 덥고 답답하고 소리 울리고 장난아냐. 호박 냄새도 나고. 그런데 왜 썼겠어. 전철이 멈추고
전철 문이 열렸다. 다시 차가운 밤공기가 들어오며 저도 모르게 일어서 버린 아오에가 공기가 밀어내는 방향을 따라 강제적으로 밀리자, 멀어져가는 아오에를 보며 호박 군은 제 호박에 손을 뻗었다.
“ 슈, 슈이치. 저기, 조금만 더… “
“ 슈스케, 안녕. “
“ 뭐가 안녕이야! 이렇게 겨우 만났는데, 이렇게… “
“ 호박 군도 말하고 싶대, 안녕이라고. “
호박이 그의 손을 따라 얼굴에서 벗어나고 바닥에 데구르르 떨어지자, 호박 군의, 슈이치의 얼굴이 보이며
아오에가 나간 전철 문이 닫혔다. 왜 호박을 쓰고, 귀찮게 묵언수행을 했겠어. 미소를 지으며 닫힌 전철 문을 바라봤다.
“ 네가 날 잊지 못할까봐 그러지. “
다시 시간이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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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헉. “
꿈인가, 어정쩡한 기분으로 이불에서 일어난 아오에는 부시시한 머리를 긁적이며 하품을 했다.
내가 어제 뭘 한 거 같은데… 안 그러면 목이 쉬었을 리가 없지.
아 맞다, 누구랑 전화한 것 같은데. 침대에서 벗어난 아오에는 밍기적 밍기적 일어나며 핸드폰을 들었다.
익숙한 이름을 누르자 몇 번의 연결음 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
“ 여보세요, 마도카? “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에도 이상하게 불안을 느낀 아오에는 속사포로 말을 걸었다. 마도카, 이상한 질문인건 아는데
혹시 내가 어제 너에게 전화를 걸었니? 네라는 대답을 기대하며 눈을 빛내보았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의문 섞인 답 뿐이었다.
“ 아뇨? 어제는 그냥 잤는데. “
그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이 퉁퉁 부은 아오에의 뒤로 액자들 가운데 이상하게 생긴 호박이 놓여있었다. 호박은 몇 번 양옆으로 구르더니, 이윽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 ....호박. “
그리고 그제야 그 얼굴이 떠올라, 아오에는 입술을 깨물었다.